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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22 화>선택! 화제의 인물  
작성일 2004-06-21 조회수 17351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 출연'' EBS, <선택! 화제의 인물> <나의 아버지 박헌영>
방송 : 6월 22일(화) 밤 11시 - 12시
담당 : 김현우PD (526-2726 / 011-9127-3664)

EBS <선택! 화제의 인물> 6월 22일(화) 방송에 해방이후 조선공산당 총비서로 활동하다 월북 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이정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이 출연한다.
해방 이후 남조선 노동당을 이끌었고 월북 후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까지 지냈던 북한 권력의 핵심인물이었던 박헌영. 그는 김일성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뒤 1956년 평양 근처 어느 산 속에서 총살당한 비운의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빨갱이로, 북쪽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남과 북 어디에서도 설 곳이 없었던 그의 운명을 평생 업보처럼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살았던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아들 원경스님. (63세 만기사 주지)
원경스님은 1993년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결심은 러시아에 거주중인 누나 박 비비안나를 비롯해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북한 고위 관계자들의 증언들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원경스님은 비판을 받더라도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각오아래 러시아와 미국, 북한의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11년이 지나고 마침내 오는 7월에 <박헌형 전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남한 땅에서 박헌영의 아들로 살아오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경스님. <선택! 화제의 인물>에서 원경스님으로부터 박헌영에 대한 모든 이야기,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의 아버지,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 출연
원경스님에게 아버지의 이름 ''박헌영''은 평생 그를 흔들어 대는 폭풍이었다. 원경스님은 아버지가 월북한 이후 전국의 절과 산을 전전하고, 지리산에선 어른 빨치산을 따라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세 때 처음 접한 아버지의 행적과 죽음은 그를 방황의 계절로 내몰았고, 자살의 위기도 겪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뒤에도 빨간 색안경으로 바라보는 눈은 여전했다. 7,80년대 험악한 시절 영문도 모르고 군인들에게 끌려가 몰매를 맞기도 하고, 안기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기도 했다.
"박헌영은 그저 나의 아버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자료들을 모아서 엮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은 끝났고, 그 분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의 몫이지요 "
이젠 박헌영이란 이름을 내놓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는 원경스님. 그가 말하는 아버지 박헌영, 그리고 굴곡 많았던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박헌영 첨부자료>> -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태어나다
아이에게 이름은 없었다. 백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와 생이별을 했다.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여섯 살 때. 사람들 말로는 한 6번쯤 봤다고 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미한 기억 뿐. 아이가 자신의 이름 석 자 ''박병삼''을 찾은 것은 환갑이 되어서였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박헌영이었다. 1921년 박헌영은 망명 중이던 상해에서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주세죽과 결혼, 딸 비비안나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1933년 상해에서 박헌영이 체포되면서 주세죽과 딸 비비안나와 헤어지게 된다. 1939년 대전형무소에서 만기출옥 한 다음, 청주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헌영은 당시 수발을 들어주던 정순년씨를 만나 1941년 지금의 원경스님(박병삼)을 낳는다. 당시 박헌영은 지하로 잠적한 상태였고,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딸을 찾아왔던 정씨의 부모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딸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 갓난아이를 집어던지고 딸을 데려간다. 부모와 생이별을 한 아이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 1943년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큰아버지 손에서 자라게 된다. 큰아버지에게 해방이 되면 아이의 아버지를 꼭 찾아달라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큰아버지 부부는 1945년 박헌영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남로당의 아지트였던 장충동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만났고, 아이는 1년 남짓한 기간동안 만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품에 안으며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북한에서는 빨갱이, 북쪽에서는 미제의 간첩이라고 불리며 어느 한 쪽에서도 쉽게 쉴 수 없는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그는 조국의 독립을 일생의 꿈으로 삼으며 살았으나, 타협하지 않고 굽힐 줄 몰랐던 굳은 신념으로 인해 삶은 비극으로 이끌어 간다.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의 삶을 짧게 정리해본다. 경성보통학교 시절 영어공부에 열을 올렸던 박헌영은 영어공부를 통해 국제적인 시각을 넓혀갔고, 1919년 20세의 나이에 3.1운동에 참가. 학생들 사이에서 반일 운동에 앞장서며 조국 독립에 대한 신념을 굳히게 된다. 남로당을 이끌었던 박헌영의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 11월 상해에 망명하면서 처음 시작된다. 다음해인 1921년, 박헌영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고 공청회의 비서가 된다. 같은 해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후 고려공산당에서 운영하던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 연구에 힘쓰게 된다. 사상 연구에 대한 열의를 보였던 박헌영에게 첫 번째 임무가 수여된 것은 같은 해 6월, 고려공산청년단 동경회를 조직하고 국내 및 재일본 조선인 노동청년단체들간의 연락선을 확보하라는 임무였다. 박헌영의 고려공산청년회 활동은 그렇게 활발하게 이뤄진다. 그러나 1925년 신의주에서 박헌영과 함께 공산당청년회 집행위원회 성원들이 체포된다. 감옥에 수감중이던 박헌영은 고문으로 인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아내였던 주세죽은 만삭의 몸이었다. 주세죽이 만삭이라는 미끼로 1928년 박헌영 부부는 탈출. 모스크바에 망명 하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공산당에 입당,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한 후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위해 코민테른에 의해 상해에 파견돼 활동하던 중 일봉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6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박헌영의 부친은 사망했고, 아내 주세죽은 절친한 동지 김단야와 재혼하게 된다. 그 후 국내 비밀 아지트에서 기거하며 지하운동을 펼쳤지만 경성콤그룹 검거사건으로 해방 전까지 도피생활을 계속한다. 해방 후 박헌영은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열을 올리기 시작.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 해방 후 이승만과 미국과 계속되는 회담을 했던 박헌영은 사회주의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고, 지지자와 비난하는 자의 사이에서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보였던 박헌영은 평양으로 건너가 조산공산당 북조선분국 간부들과 회견하는 등 활발한 사회주의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은 박헌영과 공산당을 함께 강력히 비난하기 시작했고 남한에서 박헌영의 자리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한다. 1946년 평양에서의 활동을 시작했지만 1948년 남,북이 각각 총선거와 지하선거가 이루어져 한민족이 두 나라로 나뉘기 시작한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하고, 6.25가 발발하고 박헌영의 자리를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고, 김일성은 위협적인 인물 박헌영을 총살하게 된다.
* <극단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 <한산스님>
박헌영에게 아들인 원경스님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이는 한산스님이었을 것이다. 한산스님과 20여년을 살았던 원경스님 본인마저 한산스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한산스님은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는 젊은이 사이에서 하나의 중요한 연락선 역할을 했으며, 특히 급박한 상황에서 박헌영게세 상황을 전달했던 점을 미뤄 짐작 했을 때, 박헌영에게는 분신과 같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충동 남로당 아지트가 발각된 후 큰 아버지댁에 혼자 남겨진 어린 원경스님을 산으로 데려가 극진히 키운 것도 다 그런 자신의 분신 박헌영의 아들에 대한 애정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산스님의 생존소식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 <주세죽>
박헌영의 첫 번째 부인이자 공산당 동지였던 주세죽은 함흥출생으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었으나 사회주의 이념에 매료돼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박헌영과 사이에 낳은 딸 박비비안나를 모스크바 육아원에 맡긴 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던 주세죽은 1933년 상해에서 박헌양이 체포되고 난 뒤 함께 활동했던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그 후 김단야와 결혼한 주세죽은 1937년 김단야가 간첩혐의로 처형당하고 난 뒤, 그의 아내라는 이유로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5년동안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유배당한다. 그 당시 주세죽에게는 생후 3개월인 아들이 있었으나 유배 생활 중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주세죽도 폐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 <빨갱이의 아들에서 부처님의 제자로>
생모와 생이별하고 6살에 처음 만난 아버지를 기억하며 평생을 살아온 원경스님. 10살의 나이에 한산스님에 의해 전쟁직후 지리산으로 들어간 원경스님은 그 곳에서 남로당 당원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 후 한산스님에 의해 여러 절에 맡겨지면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으며 부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1958년까지 한산스님과 지내면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원경스님은 이유도 뜻도 모르고 많은 절을 떠돌며 살아간다. 1958년 한산스님과 처음으로 선친의 제사를 지내면서 비로소 집안내력과 선친인 박헌영에 대해 알게 된다. 그 후 원경스님은 2년 동안 절을 떠나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방황 끝에 자신이 갈 곳은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뿐이라는 결론을 얻은 원경스님은 절에 돌아와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은 풀려가고 있으나, 한산스님이 끝내 말씀해주시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있었던 정혜사에 머물고 있던 원경스님에게 1963년 어머니가 찾아온다. 가슴속에 늘 그리던 어머니였으나 막상 눈앞에 나타난 어머니를 본 후 원경스님은 자살을 기도한다. 그 소식을 접해들은 한산스님은 원경스님이 병원에서 퇴원 한 후 제주도로 함께 떠난다. 한산스님과 마지막으로 만난 후 홀로 수도의 길로 들어선 원경스님은 속세에서의 지독한 번민을 부처님의 품에서 치유하게 된다. 호적도 이렇다할 이름도 없이 살았던 원경스님. 부처님의 제자가 된 원경스님이 이젠 아버지 박헌영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집을 출간한다.
* <11년의 기다림, 박헌영 전집>
1993년 초 원경스님은 역사문제연구소 설립에 직접 참여하고 학자들의 연구에 도움이 될 요량으로 박헌영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년이면 족할 것 같았던 것이 어느 덧 11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다. 박헌영 전집은 저작물과 증언, 사진자료, 연보 등 총 9권으로 구성돼있다. 국내에는 박헌영에 대한 연구 자료가 많이 않았기에 연구가들은 모스크바에 직접 찾아가 코민테르 자료를 열람하고 당시 박헌영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곳이면 밤낮,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3년의 자료조사기간, 1년의 편집기간, 총 9권의 전집을 출간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들의 노력과 땀으로 일궈낸 박헌영 전집은 아들인 원경스님에게 긴 기다림이었으나, 7월 출간을 앞두고 있는 지금. 평생의 숙제를 마친 마음으로 그동안의 오랜 기다림을 홀로 달래고 있을지 모른다. "위인처럼 신격화하자는 의도가 아닙니다. 나 죽으면 해 줄 사람이 없어서 한 겁니다. 그 양반, 비판받을 건 비판받아야지요. 단지 숨겨졌고 악의적으로 왜곡됐던 것을 자료를 통해 복원하고 확장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저의 몫은 그동안 모은 사료들을 엮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 것은 학자들이 할 몫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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