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변화를 선도하는 EBS
프로그램의 최신소식에서 교육 채널 소식까지 EBS의 보도자료를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게시판 보기 페이지입니다.
제목    '다큐프라임' 한양의 뒷골목  
작성일 2011-04-21 조회수 12900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관련사진은 EBS 사이버홍보실 하이라이트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조선에도 파티플래너와 연예기획자가 있었다?


EBS <다큐프라임> 한양의 뒷골목


18세기 조선의 뒷골목 풍경과 마이너 인생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다큐드라마


방송 : 4월 25일(월)~27일(수) 밤 9시 50분~10시 40분


연출 : 이주희 PD (010-2608-8714)



신윤복의 풍속화속 사람들, 실제로는 어떻게 살았을까? 무수한 사극들 속에서 재현해내는 조선의 이미지들은 얼마나 조선후기의 실제 풍속을 반영하고 있을까?


EBS <다큐프라임> ‘한양의 뒷골목’이 여기 조선후기 한양의 저잣거리에서 펼쳐지는 조선민초들의 생생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조선후기. 정확하게 영조 즉위초(1728년 전후)를 배경으로 민초들의 삶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는 다큐드라마인 ‘한양의 뒷골목’은 그동안 관심의 변방에 머물렀던 뒷골목 민초들의 삶에 주목한 최초의 다큐멘타리이자 검계, 기녀, 왈자, 거지, 포도청 등 고고한 유학자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조선시대 뒷골목 인생들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다.


영조 즉위초인 18세기 초는 시장경제의 발달에 힘입은 도시 저잣거리 문화의 출현기였다. 이 다큐멘타리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한국인들이 즐기는 많은 문화적 코드들이 18세기 초에 출현했다는 흥미로운 사실과 만나게 된다.


또한 ‘판소리’를 이용한 내레이션을 시도, 신명나는 다큐드라마가 완성됐다. 세심한 재현을 통해 만들어낸 아기자기하고 풍성한 18세기 조선의 모습들도 볼거리다. 최근 방송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캐논의 5D mark2로 모든 방송분량을 촬영. VDSLR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영상을 선보인다.


<조선의 파티 플래너 이자 연예기획자 ‘대전별감’>

조선후기 저잣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별감이다. 연희판의 기획자이자, 기방의 주인으로써 별감들은 조선후기 문화계의 주역이었다. 조선시대의 통치규범을 확립한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액정서(掖庭署)란 관청이 있는데, 액정서(掖庭署)에 소속된 별감(別監)의 임무는 이렇다. 

‘왕명의 전달과 알현(謁見, 傳謁) 및 임금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공급, 궐문 자물쇠와 열쇠의 관리, 궁궐 내정(內庭)의 설비 등의 임무를 맡는다.’  

그렇지만 별감(別監)은 그들의 직무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별감을 독특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은 별감이 ‘노는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별감(別監)은 ‘놀이’를 주관하는 일을 맡아 하면서 연회 행사장을 꾸미고, 기생(妓生)을 불러 가무(歌舞)를 제공하고, 행사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유흥을 즐길 수 있도록 챙기는 일을 했다. 지금으로 본다면 ‘파티 플래너(Party Planner)’ 혹은 이벤트 기획자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들은 기방(妓房)의 기녀(妓女)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존재여서, 화류계를 드나드는 양반들도 별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최대의 연희판 ‘승전놀음’>

시장경제의 발달과 함께 대중문화는 화려함을 더해가고, 그 연희판중 가장 화려한 것은 별감들이 주도하는 승전놀음이었다. 대전별감이라는 위세에 빗대어 왕명을 받들어 놀이판을 벌인다는 이름으로 기획했던 ‘승전놀음’. 하지만 승전놀음은 실제 별감들의 잔치판이었다.

조선 후기 서울의 풍속과 왕의 능행(陵行), 양반들의 놀음, 선비들의 과거시험 등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한양가(漢陽歌)’란 가사(歌辭)가 있다. 1848년경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이 가사(歌辭)는 국문학 연구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한양가에 조선후기의 다양하고 화려한 놀이 문화들이 묘사되어 있다.

“화려가 이러할 제 놀인들 없을소냐 / 장안소년 유협객과 공자왕손 제상자제 / 부상대고 전시정과 다방골 제갈동지 / 별감 무감 포도군관 정원사령 나장이라 / 남북촌 한량들이 각색 놀음 장할시고 / 공물방 선유놀음 포교의 세찬놀음 / 각사 서리 수유놀음 각집 겸종 화류놀음 / 장안의 편사놀음 장안의 호걸놀음 / 재상의 분부놀음 백성의 중포놀음 / 각색 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철다”

이중에서도 별감들이 주도한 승전몰음은 당대의 기생, 명창, 악공이 총동원되어 서울장안을 떠들썩하게 할만큼 대단한 놀이로 당시로서는 호화판 놀이의 극치였다.


<뒷골목을 휘젓고 다닌 조직폭력배 ‘검계’>

조선사회에도 사회악은 있었다. 검계(劍契)와 왈자(曰字)로 불리던 문제집단이 그들. 군사조직에 가까운 조직과 규율을 갖췄던 검계, 사실상 기방의 운영자였던 왈자. 이들 때문에 조선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규상이 쓴 장대장전(張大將傳)에 보면 검계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있다.

“서울에는 오래 전부터 무뢰배들이 모인 것을 ‘검계’라 하였다. ‘계’란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모인 것을 이르는 말이다. 검계 사람은 옷을 벗어 몸에 칼을 찬 흔적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낮에는 낮잠을 자고 밤에는 나돌아다니는데, 안에는 비단옷을 받쳐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다.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신고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삿갓 위에는 구멍을 뚫고 삿갓을 내려 쓴 뒤, 그 구멍으로 사람을 내다본다. 혹은 스스로 칭하기를 ‘왈자’라고 하며, 도박장과 창가(娼家)에 종적이 두루 미친다. 쓰는 재물은 전부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다. 양가 부녀자들이 겁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대개가 호가(豪家)의 자식들이어서 오랫동안 제압할 수가 없었다. 장대장이 포도대장으로 있으면서 검계 사람을 완전히 잡아 없애고 발뒤꿈치를 뽑아 조리를 돌렸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짓고땡을 했다 - 투전판 풍속>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제9부 刑典 六條 제5장 禁暴에는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도박은 ①바둑 ②장기 ③쌍륙(雙陸) ④투패(鬪牌, 馬弔, 투전) ⑤강패(江牌, 骨牌) ⑥척사(擲柶)이다”라면서 “여러 도박 중에서 마음을 망가뜨리고 재산을 탕진하여 부모와 종족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마조(투전)가 첫째이고 쌍륙․ 강패가 그 다음이다. 아전이 포흠(逋欠)을 지고 군교가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이 때문인 경우가 많으니 수령은 마땅히 거듭거듭 영을 내려 엄중히 금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중 그 페해가 가장 컷다는 투전을 살펴보자. 투전(鬪牋, 鬪錢)은 두꺼운 종이로 너비는 손가락만하고, 길이는 15cm쯤 되게 만들어 그 위에 인물·새·짐승·곤충·물고기 등의 그림 또는 시구(詩句)나 문자를 그려 끗수를 나타낸다. 원래 중국에 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사를 통해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설과 숙종 때 장현(張炫)이 당상통역관(堂上通譯官)으로 중국에 드나들면서 가져왔다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처음에는 장현처럼 중인 이하의 계층에서 투전을 즐겼으나 나중에는 양반 계층도 투전을 즐기게 된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역관·비장배(裨將輩, 장수 보좌진)와 투전판을 벌여 돈을 땄다고 쓰고 있으며,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재상이나 명사, 승지, 옥당(이른바 청직)까지 돼지 치는 자들이나 하는 놀이(곧 투전)를 하는 세태를 개탄했다. 또한 효종의 딸 경숙옹주의 손자로서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원경하의 아들인 원인손(元仁孫)이 18세기 투전판의 타자(打子, 투전의 고수)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투전이 성행하여, 기방 등에 도박장을 차려 놓고 영업하는 사람이 많았다.

투전의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어 동동(同同)이·가보잡기·찐붕어·엿방망이 등이 있으나 모두 속임수를 쓰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투전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화투가 들어오기 이전까지 가장 성행했던 노름으로 화투의 한국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놀이로 화투에서 사용되는 쪼기·짓고땡·족보·타자 등은 원래 투전 용어였다.

  

<18세기 여인네들의 화장법>

현대식 화장품이 없던 옛날에는 어떤 화장품을 썻을까? 기생들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의 화장법을 살펴보자.

일단 대표적인 미백용 화장품으로 쌀뜨물이 있었다 쌀을 씻고 나온 쌀뜨물로 세수를 하면 피부가 깨끗해 지고 쌀뜨물의 비타민이 피부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돈이 좀 있다면 쌀뜨물이 아니라 쌀을 가루내어 곱게 한 뒤 그것을 물에 타서 쓰기도 했다. 또 녹두나 콩, 팥등을 갈아서 쓰기도 했다. 특히 녹두의 사포닌은 묵은 때나 각질을 벗겨주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화장수로 얼굴을 씻어 내린 후 베이스로 쌀가루나 분꽃씨등에 활석이나 황토가루를 섞어 미백 효과를 낸 후 요즘 눈썹 다듬듯 족집게로 잡털을 뽑은 다음 너도밤나무나 버드나무의 목탄으로 눈썹을 그리거나 등잔의 그을음을 붓으로 찍어 짙고 가는 검은 눈썹을 만들었다.

그리고 돌가루, 홍화꽃잎, 주석등을 기름 일정비율로 잘 섞어 볼과 입술에 터치를 넣었다. 당시 미의 기준은 지금처럼 뻘건 립스틱색은 그리 대우받지 못했기 때문에 살짝 붉은기를 보이는 이런 화장법이 건강함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널리 애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홍화꽃잎의 경우 잘 빠아 걸러 습기를 뺀 후 가루를 내었다가 기름을 먹인 한지등에 싸두고 쓸때마다 가루를 덜어내어 기름과 혼합하여 붓으로 입술라인을 그려 넣었다.

얼굴 전면의 화장을 끝내면 이제 마지막으로 머리를 손질한다. 가체를 올리기 전에 동백기름을 이용해 이마를 넓고 맑게 보이기 위해 앞머리를 기름으로 올려 단정하게 다듬고, 튀어나온 머리는 족집게로 끊어 낸다. 그리고 머리를 손질하고 가체를 올리고, 온갖 장신구를 치장한다.


<화려한 패션의 리더 ‘기녀’>

기생복장의 가장 큰 특징은 저고리는 작고, 치마는 풍성했다는 점이다. 아마 좀 더 에로틱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복장을 여염집에서도 따라 하기 시작한다. 이덕무 같은 분은 저고리가 꼭끼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보통 저고리는 속적삼·속저고리·겉저고리 등 삼작이며, 치마는 겉치마에 볼륨을 넣으려고 안에 무지기를 입었고, 때에 따라서는 대슘치마까지 받쳐 입었다. 무지기는 허리 부분을, 대슘치마는 아랫도리를 버티어 주었다.

또 기생들은 의도적으로 속옷이 보이게 치마를 치켜올려 허리띠를 매고 외출하였는데, 이것이 치마를 더욱 둥글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또 외출시에는 쓰개치마나 장옷대신에 천의나 전모를 써 얼굴을 보이게 하였다.


<기녀들도 등급이 있었다는데>

이능화가쓴 “조선 해어화사”에 보면 기생들도 등급이 있었다고 한다.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었는데 우선 일패는 궁중에서 여악(女樂)으로 어전에 나아가 가무(歌舞)를 하는 일급기생을 일컫는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급이 낮은 기생으로서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라고 하며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지만 은밀히 매음도 하는 즉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숨어서 매음하는 류의 기생이었다. 3패는 탑앙모리, 혹은 더벅머리라고 불리는데 술좌석에서 품위 있는 기생의 가무같은 것은 하지 못하고 잡가나 부르며 내놓고 매음하는 유녀(遊女)를 가리킨다고 한다.

   

<한양에만 있었다는 ‘기방출입의 법도’>

지방과 달리 시장경제가 발달하여 기방 출입자가 많은 한양에는 별도의 출입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방에서는 기녀가 한번에 한명 혹은 한팀의 손님들만을 기방에 들이고 문을 닫았는데 한양은 수요가 워낙 많아서 한번에 여러며, 여러팀의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들 남성들간에 싸움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생겨난 것이 출입법도이다.

우선 기방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미 기방에 들어가 있는 손님에게 격식을 갖춰 문답을 하며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야 했으며, 기생의 노래를 청할 때도 역시 법도가 있었다. 이런 규칙을 모르면 기방에 출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카페 ‘절초전’>

조선 중기에 들어온 담배는 후기가 되면 가장 대중적인 기호품이 되어서 한양에 많은 수의 담뱃가게가 생겨났다. 그중에도 재미있는 것이 절초전이다.

김홍도의 ‘담배 써는 가게’라는 그림에 보면 남자 넷이 등장하는데, 각각 하는 일이 다르다. 아래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넓은 잎사귀를 펼쳐서 다루고 있다. 그 아래에 차곡차곡 쌓인 것은 담뱃잎이다. 또 위쪽 왼편의 사내는 작두로 장방형으로 생긴 물건을 가늘게 썰고 있다. 아마도 담배잎일 것이다. 아래쪽 왼편에 있는 탕건을 쓴 사내는 부채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다. 아마 소설 따위의 가벼운 책일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담배 가게에서 소설을 읽었다는 것이다. 담배 가게는 약국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조선후기 서울 시민의 카페와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고담(古談)을 하기도 하고 또 소설책을 읽기도 했다.

담배를 썰어서 파는 곳을 절초전(切草廛)이라 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 담배가 널리 퍼지자, 조정에서는 담배 판매의 독점권을 갖는 엽초전의 개설을 허락하였다. 그 뒤 담뱃잎을 그냥 팔거나 큼직하게 잘라 파는 엽초전에서 담뱃잎을 사다가 피우기 좋도록 가늘게 썰어서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엽초전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엽초전과 절초전 사이에 상권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완벽하게 재현해 낸 300년전 조선검무>

조선후기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전통무인 검무. 그 검무를 대중화시킨 인물은 조선후기의 슈퍼스타인 밀양기생 운심이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검무와 달리 18세기 검무는 춤보다 오히려 무예에 가까운 것이었다. 우선 검부터 다르다. 요즘 흔히 보는 검무와 달리 장검을 쓴다. 더구나 운심의 검무를 기록한 박제가의 글을 보면 그 춤사위는 춤보다 무예도보통지의 검술편에 가깝다. 훨씬 역동적이고 남성적인 춤이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저잣거리 인물들에 큰 관심을 가졌던 박지원이나 박제가도 기록으로 남기며 감탄했던 운심의 검무를 평생 운심의 검무를 재현해온 김은희 선생의 도움으로 검무를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다.



[ 각 부 주요 내용 ]

● 제 1 부

날짜 : 2011년 4월 25일(월), 밤 9시 50분

18세기 한양, 그 뒷 골목으로 다시 돌아온 표철주. 그 동안 한양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다. 그는 임금의 호위무사를 지냈으나 그 기질은 어디가랴....

시전에서 조선 최고의 검무 기생 운심이 도둑질 당할 뻔 한 것을 구해주고 그 것을 계기로 그녀의 기방에서 일을 시작한다.

한편 조선 최고의 포도대장 장붕익은 그 당시 조폭 검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한양의 치안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철주는 운심의 기개와 예인으로서의 풍모를 보고 점점 반하게 되는데... 

더불어 조선후기 카페인 절초전, 조선판 조폭조직 검계, 유흥문화의 담당자 별감, 한양만의 독특한 기방문화, 그리고 표철주와 운심, 거지왕초 광문과 포도대장 장붕익에 대해 알아본다. 




● 제 2 부

날짜 : 2011년 4월 26일(화), 밤 9시 50분

철주는 운심에게 마음이 점점 끌린다. 검계들은 점점 흉폭해저만 가고 장붕익 포도대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검계 일당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승전 놀음 준비로 한참 바쁜 운심이네 기방. 그날 검무를 추기로 되어있는 운심과 함께 준비를 하는 철주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승전놀음 날 그 곳을 방문한 장대장은 운심을 보고 지난 날 자신을 떠난 누이와 너무 흡사함에  놀라는데...

 더불어 포도청의 은어들, 조선 최대의 놀이판인 승전놀음, 기생들의 화장법과 복식, 투전과 노름판 문화 등에 대해 알아본다



● 제 3 부

날짜 : 2011년 4월 27일(수), 밤 9시 50분

자신의 누이와 함께 떠난 사람이 표철주 임을 알게 된 장대장. 철주에게 칼을 겨누고, 철주는

지난 날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장대장에게 이야기 한다. 지방에서는 역모의 바람이 일어나는 가운데 철주와 운심은 야간 기찰에 걸려 옥에 갇혔지만 숙지를 조건으로 풀려난다.

운심은 대감집 도련님의 술자리에 끌려가 춤을 추게 되고 철주는 이를 참지 못하고 대감집 도련님을 죽이게 되는데...

 더불어 포도청의 구조와 수사기법, 장붕익의 검계소탕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 그리고 다양한 저잣거리 풍속을 살펴본다 

이전글
'한국기행' 봄 특집 - 남도의 봄
다음글
EBS 초대석 - 한국개발연구원 현오석 원장 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