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변화를 선도하는 EBS
프로그램의 최신소식에서 교육 채널 소식까지 EBS의 보도자료를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게시판 보기 페이지입니다.
제목    현충일 특집 영화 ''5인의 해병'  
작성일 2011-06-02 조회수 13023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보도자료] EBS 현충일 특집 영화 <5인의 해병(감독 김기덕)>


EBS 현충일 특집 영화 <5인의 해병> 방송


1961년작, 감독 김기덕

출연 : 신영균, 최무룡, 황해, 박노식, 곽규석, 독고성, 김승호


방송 : 6월 6일(월) 낮 12:10


문의 : 심예원 PD (02-526-2569)



EBS는 현충일을 맞아 김기덕 감독의 영화 ‘5인의 해병’을 방송한다.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으로 이듬해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박계주의 역사소설 <5인의 해병>이 원작이다.


감독 : 김기덕

출연 : 신영균, 최무룡, 황  해, 박노식, 곽규석(후라이보이), 독고성, 김승호

제작 : 1961년

영화길이 : 119분

나이등급 : 15세

HD 방송



< 줄거리 >


한국전쟁에 참전한 해병 소위 오덕수(신영균 분)는 일선의 소대장을 자원하여 전선으로 간다. 아버지 오성만 중령(김승호 분)이 대대장으로 있는 부대로 가게 된 오덕수를 그의 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하지만 어릴 적부터 항상 자신보다 형을 더 아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은 아직까지 그의 가슴에 깊게 남아있다. 


중공군과의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전선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고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지쳐간다. 현재의 위치만을 고수하라는 지시 속에 분대장과 분대원들의 갈등이 나타나고, 시골 출신의 영선(박노식 분), 학사 출신의 종국(최무룡 분), 고향에 홀어머니를 두고 온 훈구(황 해 분), 의장대출신의 주환(곽규석 분)은 자신들을 못살게 구는 분대장이 무척 못마땅하다. 


어느 날, 하영규 이병과 잠복근무를 나간 종국은 적의 갑작스런 기습을 받는다. 잠깐 동안의 교전 상황 속에서 영규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종국을 살리고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그의 죽음으로 종국은 그동안 이기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영규를 아꼈던 분대장은 그가 죽자 홀로 적지로 수색을 나갔다가 중상을 입고 돌아온 후, 적의 상황과 이동 계획 등 중요 기밀을 알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적의 탄약고 폭파를 위한 특공대 편성 작전이 하달되고, 오소위는 분대장의 죽음에 자극되어 특공대를 자원한 영선, 종국, 훈구, 주환과 함께 살아 돌아오기 힘든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떠나기 직전 오소위는 아버지로부터 형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간의 모든 오해를 풀게 되며 오중령은 그에게 살아 돌아올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병사들은 하나둘씩 목숨을 잃고 결국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후 중상을 입은 오소위 역시 종국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5명의 해병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 온 종국은 눈물을 머금고 오중령에게 작전 수행 결과를 보고하며 오소위의 유품을 전달한다. 



< 해설 >


전쟁영웅으로서의 해병대에 대한 묘사보다는 대원 한 명 한 명의 캐릭터와 인간적인 면을 잘 살린 작품이다. 창호와 내무반의 풍경, 부대원의 사연 등을 자세하게 묘사해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 전반부와 실감 넘치는 전쟁 장면으로 이루어진 후반부가 강약의 조화를 이루며 장렬한 최후를 마치는 부대원들의 죽음에 비극미와 감동을 배가시킨다. 오락으로서의 전쟁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첫 번째 한국영화.


< 감상 포인트 >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1961년은 4.19 혁명 이후에 소재의 개방이나 검열의 완화 등으로 매우 활발하게 여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가 1961년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영화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강화되고 그래서 다소는 위축됐던 이러한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영화 <5인의 해병>은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으로 만들어졌다. 또 이 영화로 김기덕 감독은 1962년에 만들어진 제 1회 대종상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한 뜻깊은 영화이다. 5.16 이후에는 이러한 전쟁영화들이 전쟁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가차없이 검열의 칼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점점 전쟁영화라는 장르도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국책영화로 흐르게 됐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국책영화 또는 계몽영화라고 처음부터 계획됐던 그러한 영화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영화라는 장르가 갖는 묘미 중 하나는 이와 같은 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서는 어쩌면 좀 더 다른 해석의 가능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5인의 해병> 같은 경우에도 겉모습으로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국책영화이자 전쟁영화이지만, 이 영화 속에서 군인들의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에 초점에 맞춤으로서(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각 개인들이 안고 있는 사연과 갈등, 에피소드 등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전쟁 속에서 파괴되어져 가는 모습, 그리고 그들의 죽음의 의미를 관객들이 반추해 보면 전쟁의 잔인성을 생각하게도 할 수 있지 않나 이렇게 해석을 해 본다. 말하자면 영화를 기획한 의도와는 관계없이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일종의 반전영화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이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영화 속에서는 김승호, 신영균, 최무룡, 황해, 독고성 등 정말 기라성 같은 연기자들의 연기도 돋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후라이 보이’ 곽규석과 그리고 질퍽한 호남 사투리를 구사하는 박노식의 절묘한 콤비 연기라고 하겠다. 특히 곽규석은 당시의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1958년 비행기 앞에서 결혼식을 벌이는 화제를 모음으로서 이후로부터 ‘후라이 보이’라는 애칭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약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 속에서도 연예인의 꿈을 가지고 있는 조금 촐랑거리는 캐릭터지만 진지할 때는 진지한 면을 보여주는 그러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전쟁영화 스케일이 비교적 다양하게 묘사가 되고 있는데 그러한 군인들의 삶이랄지 막사의 모습 또 전투장면이란 것들 그 당시 한국영화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매우 지난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특수효과를 내기 위해서 실탄을 사용했던 시절 정말 제작환경의 어려움이란 말로만은 실감할 수 없는 그러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면서 영화를 찍기까지 했던 당시 영화인들의 열정과 의지에 새삼 놀라울 뿐이다.



< 감독 >

 

1930년 9월28일 서울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감독은 1961년 <5인의 해병>이란 전쟁영화로 데뷔했다. 이후 그는 많게는 한 해에 여덟 편 그리고 적게는 한두 편씩 20여 년 동안 7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정열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음과 같다. 1963년에 <가정교사>, <77번 미스 金>, 1964년에 <천안삼거리>, <맨발의 청춘>, <떠날 때는 말없이>, 1965년에 <남과 북>, <용사는 살아있다>, 1966년에 <말띠 신부>, <종점>, 1967년에 <여대생 사장>, <내 멋에 산다>, <대괴수 용가리>, 1968년에 <아네모네마담>, <성난 대지>, 1969년에 <샹하이 부루스>, <남의 속도 모르고> 등을 만들었다. 1970년대 들어와서도 그의 다작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971년에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명동 부루스>, 1971년에 <열 아홉 순정>, <카츄샤>, 1972년에 <결혼반지>, <별이 빛나는 밤에>, 1973년에 <하숙인생>, 1974년에 <유관순>, <꽃상여>, 1975년에 <가수왕> 그리고 1977년에 <영광의 9회말>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은 1964년 작인 <맨발의 靑春>이라는 청춘물이자, 이른바 깡패영화다. 1990년대 후반 들어서 이른바 조폭영화(組織暴力을 다룬 영화)들이 크게 유행했는데, 사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960년대에도 깡패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심심찮게 만들어졌다. 이 당시만 해도 아직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때였으므로, 힘없고 가진 것 없는 가출 청소년들이 쉽게 암흑가라는 파멸의 길로 빠져들었다. 이 계열의 대표작이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이 작품은 깡패들의 세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또한 애절한 로맨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개봉당시 일반관객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한국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신성일이 비운의 깡패인 두수 역을 맡았고, 그와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되는 외교관의 딸 요안나 역은 엄앵란이 맡아 열연했다.


한국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6.25 동족상잔은 한국인의 실제 삶뿐만이 영화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들어와서도 6.25의 상흔은 어떤 형태로든지 영화 속에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반공을 전면에 내세운 전쟁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전쟁영화라 하면 곧바로 반공영화와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감독의 <남과 북>(1965년)은 제목에서 풍기는 대로 남북분단으로 인해 초래된 가족관계의 파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쟁영화다. 그런데 종래의 전쟁영화들이 대부분 이데올로기라든가 전투장면 같은 스펙터클에 치중해 온데 비해서, <남과 북>은 전쟁 자체의 상황보다는 인간의 정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전글
'직업의 세계-일인자' 0.6초에 감성을 사로잡다 - 산업디자이너 김영세
다음글
'EBS 초대석' 김선욱 이화여자대학 총장 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