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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큐 10' 이집트 발굴 비사  
작성일 2007-10-11 조회수 17294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탐험가들이 고대 이집트에 매료된 이유는? 『다큐 - 10』이집트 발굴 비사 (원제 : EGYPT, 2005년 BBC 방송)
고대 이집트에 매혹된 고고학자들과 탐험가들의 시간 여행 소년왕 ‘투탕카멘’과 그의 무덤 발굴을 둘러싼 이야기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2세’의 와 탐험가 ‘지오반니 발조니’ 고대 이집트 문명의 입을 열게 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방송 : 10월 15일(월) ~ 10월 22일(월) 6부작(월-금 방송)
기획 : 글로벌팀 이유자 PD (526-2568) 녹음 연출 : 글로벌팀 정애진 PD (526-2585)
고대 이집트 문명은 178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이전까지 외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데려간 학자들과 군인들에 의해 시작된 연구는 이후 조금씩 그 비밀을 드러냈고, 샹폴리옹의 로제타스톤 해독은 고대 이집트 문명 이해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모래 속에 묻혀 3,000년간 잊혀졌던 문명의 신비를 벗겨낸 탐험가들과 학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고대 이집트 문명에 매혹됐을까? 이집트 현지에서 촬영된 재연화면들로 18세기와 19세기를 살았던 진짜 인디애나 존스들과 3,000년 전 파라오들의 삶을 생생히 느껴보자. ‘이집트 발굴 비사’는 6부작 다큐멘터리이고, 3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1부와 2부는 투탕카멘 왕묘를 찾아낸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와 소년왕 ‘투탕카멘’의 이야기를 다룬다. 룩소르 부근 ‘왕가의 계곡’에서 도굴 당하지 않은 유일한 왕묘는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됐는지, 투탕카멘의 짧은 인생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3부와 4부의 주인공은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와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다. 아부심벨 신전과 세티 1세의 왕묘를 찾아낸 벨조니가 서커스 차력사에서 탐험가로 변신한 과정과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파라오 중 하나로 꼽히는 람세스 2세의 삶이 펼쳐진다. 5부와 6부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입을 열게 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의 이야기다. 가난한 시골소년이 어떻게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을 젖히고 로제타스톤 해독에 성공했는지, 평생 소원하던 이집트 여행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뤘는지에 대한 얘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집트 발굴 비사’를 통해 고고학자들과 탐험가들의 치열했던 삶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 불굴의 용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제1부: 소년왕 투탕카멘 원제: (EGYPT-The Search for Tutankhamun) 방송일: 2007년 10월 15일 (월) 밤 9시 50분 20세기 초반 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을 찾기 위한 서양 고고학자들의 발굴작업이 계속된다. 그러나 발견되는 왕묘들은 모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다. 하지만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투탕카멘왕의 무덤을 찾아낸다. 카터는 어떻게 역사 속 기록마저 희미한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이집트 현지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재연화면을 통해 기원전 1300년대를 살았던 소년왕 투탕카멘과 20세기 초 이집트로 몰려든 서양 고고학자들을 만나보자. 소년왕 투탕카멘은 8살 때 왕위에 올랐고, 누나인 ‘안케센아멘’과 결혼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족의 근친결혼은 권력분산을 막기 위한 풍습이었다. 소년왕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건, 군권을 맡았던 신하 ‘아이’였다. 파라오가 된 투탕카멘은 자신의 무덤 건설을 시작한다. 왕묘 공사는 비밀리에 파라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만, 투탕카멘의 왕묘가 필요한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온다. 소년왕 투탕카멘이 18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워드 카터는 고대유적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이집트에 왔다. 고고학자 밑에서 일하며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1898년 폭풍피해를 조사하러 서부 테베로 갔다가 왕묘의 흔적을 발견한다. 본격적으로 그의 발굴을 지원한 사람은 영국의 귀족 ‘카나번 경’이었다. 두 사람은 1908년 발굴을 시작했고, 파라오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왕가의 계곡 발굴은 1914년에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과 카나번의 재정지원 중단결정 등으로 발굴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카터는 불굴의 의지로 모든 위기를 넘겼고, 1922년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아낸다. 제2부: 투탕카멘의 저주 원제: (EGYPT - Ep2. The Curse of Tutankhamun) 방송일: 2007년 10월 16일 (화) 밤 9시 50분 소년왕 투탕카멘과 그의 무덤을 처음으로 찾아낸 영국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카터의 발견이 알려지고, 저명한 고고학자와 이집트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조직된다. 하지만 이집트 유물국의 간섭은 심해지고, 카터의 독단적인 발굴진행 방식에 불만을 품은 학자들이 떠나며 처음의 흥분은 가라앉는다. 언론과 일반인들의 지나친 관심도 달갑지 않은 카터는 후원자인 카나번 경과도 말다툼을 벌인다. 언론에서는 ‘투탕카멘의 저주’에 관한 헛소문을 퍼트리고, 카나번 경이 세균감염으로 세상을 뜨며 소문은 더 퍼져나간다. 투탕카멘은 10년간 파라오의 자리를 지켰고, 18세에 다리 부상으로 인한 세균감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암살인지 사고인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왕묘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투탕카멘은 신하인 ‘아이’가 자신의 무덤으로 건설해둔 곳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식은 서둘러 치러졌고, 그의 곁에는 사산된 태아 둘의 시신까지 미라로 처리돼 묻힌다. 장례식 후, 그의 무덤은 밀봉됐고, 새 왕조가 들어서며 그에 대한 기록은 지워졌다. 이집트 유물국과의 마찰로 발굴을 중단했던 카터는 1년 만에 발굴을 재개했고, 투탕카멘 왕묘의 발굴을 마무리짓는다. 그의 조수로 발굴에 참가했던 ‘아서 메이스’가 사망하며 투탕카멘의 저주에 관한 소문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카터는 65세까지 살다가 1939년 사망한다. 그의 학문적인 성취는 기념비적인 것이었지만, 영국과 이집트 정부는 그의 생전에 어떤 훈장도 수여하지 않았고, 그의 장례식은 쓸쓸히 치러졌다. 하지만 투탕카멘 왕묘는 지금도 최고의 고고학 유적 중 하나로 남아있다. 제3부: 위대한 람세스 원제: (EGYPT-The Pharaoh & the Showman) 방송일: 2007년 10월 17일 (수) 밤 9시 50분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가장 많이 찾아내어 유럽으로 실어 날랐던 사람 중 하나인 ‘지오반니 벨조니’와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파라오 중 하나로 칭송 받는 ‘람세스 2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탈리아 파두아 출신인 벨조니는 영국으로 건너가 서커스의 차력사가 되지만 그 일이 기대에 미치지 않자 이집트 카이로로 간다. 수차를 만드는 기술자로 이집트 생활을 시작했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고, 탐험가인 부르크하르트의 소개로 유물을 운반하는 일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는 이집트 주재 영국 총영사 헨리 솔트의 요청으로 룩소르에 있는 신전의 ‘멤논 흉상’ 운반을 맡는다. 당시까지도 멤논으로 알려져 있던 이 흉상의 주인공은 사실 고대 이집트의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였다. 세티 1세를 이어 파라오가 된 람세스 2세는 강력한 전제군주였고, 전통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곳곳에 신전과 기념비 등을 건설했다. 그는 테베(룩소르)의 신전들을 보수했고, 후대 파라오들이 자신에 대한 기록을 지우지 못하도록 조각 방식까지 바꾸었다. 얕고 정교한 돋을새김 대신 깊은 조각을 하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각종 건축물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지방 관리의 비협조와 프랑스인 탐험가 드로베티의 방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벨조니 부부는 나일강이 범람하기 전, 석상을 강둑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카이로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벨조니 부부는 전설의 신전 아부심벨을 보기 위해 누비아로 내려간다. 그리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땅 누비아에서 벨조니는 다시 한번 람세스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제4부: 모래 신전의 비밀 원제: (EGYPT-The Temple of the Sand) 방송일: 2007년 10월 18일 (목) 밤 9시 50분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와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누비아의 아부심벨 신전 앞에 도착한 벨조니 부부, 하지만 입구를 막고있는 모래더미 때문에 훗날을 기약하며 카이로로 돌아온다. 벨조니는 이집트 주재 영국 총영사 솔트의 후원으로 다시 남부 탐험을 떠나고, 솔트의 비서이자 화가인 ‘윌리엄 비치’와 그리스 출신 탐험가 ‘야니 아타나시’도 그를 따라간다. ‘드로베티’의 방해 때문에 룩소르와 필레에서 좌절을 맛본 벨조니 일행은 필레에서 만난 영국 해군장교 둘과 함께 아부심벨로 향하고, 드디어 신전 안으로 들어간다. 기대했던 황금은 없었지만, 신전 안에는 그보다 더 귀중한 유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부심벨에는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원정이 벽화로 기록돼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즉위 5년째에 카데시 공격을 감행하는데, 허위첩보에 속아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을 신격화한 그림과 조각을 신전에 배치하고 업적을 과시한다. 하지만 16년 후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평화조약을 맺었고, 이집트는 커다란 경제적 이득을 얻는다. 룩소르로 돌아온 벨조니는 파라오들의 무덤을 찾아 나선다. 후원자 솔트가 유물상인에 지나지 않고, 자신이 발굴한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부자들한테 팔려나간다는 걸 안 벨조니는 절망한다. 하지만 아내의 격려로 발굴은 계속되고, 벨조니는 오늘날 ‘왕가의 계곡’으로 알려진 곳에서 ‘세티 1세’의 무덤을 발굴한다. 그는 왕묘 내부를 자세히 그리고 기록해 복제품을 만들었고, 유럽에서 전시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둔다. 결국 그의 소원은 이뤄졌다. 지금 대영박물관 이집트관엔 벨조니가 찾아낸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제5부: 로제타스톤의 수수께끼 원제: (EGYPT-The Mystery of the Rosetta Stone) 방송일: 2007년 10월 19일 (금) 밤 9시 50분 고대 이집트 문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어준 로제타스톤의 발견과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 ‘히에로글리프’ 해독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1798년 이집트를 침공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는 이듬해 이집트 로제타에서 이상한 비석을 발견한다. 고대 이집트 신성문자와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로 같은 내용을 3번 적어놓은 비석이었다. 비석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집트 정복 이후 들어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칭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제타스톤은 이집트어와 문자를 모르는 지배계급에 대한 이집트 민중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다. 로제타스톤은 이후 영국의 손으로 넘어간다. 넬슨 제독의 해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프랑스군이 수집한 이집트의 유물들도 영국이 압수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학자들은 로제타스톤의 탁본을 가지고 돌아갔고, 곧바로 연구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 학자들은 로제타스톤의 이집트 신성문자 히에로글리프 해독 경쟁을 벌인다. 프랑스 대표는 유년기부터 언어에 대한 천재적 재능을 보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었고, 영국 대표는 과학자, 의사 겸 언어학자인 ‘토머스 영’이었다. 둘의 경쟁은 결국 샹폴리옹의 승리로 돌아간다. 샹폴리옹은 히에로글리프가 단순한 상징이나 뜻글자(표의문자)라는 보편적 학설을 뒤집고 그것이 소리글자(표음문자)의 성질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낸다. 고대 이집트어의 후손인 콥트어와 이집트 민중문자 연구가 큰 도움이 됐다. 이렇게 샹폴리옹은 히에로글리프 해독에 성공했지만, 가톨릭교회는 그의 연구 때문에 성서에 나온 이야기들의 허구가 밝혀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제6부: 상형문자의 비밀 원제: (EGYPT-THE SECRET OF HIEROGLYPHS) 방송일: 2007년 10월 22일 (월) 밤 9시 50분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해낸 샹폴리옹은 직접 수많은 원전자료를 대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고 싶은 마음에 이집트 행을 꿈꾸지만 가난하고 일자리도 없는 그에게 이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이집트와 히에로글리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 끝에, 어느 날 마침내 기회를 잡게 된다. 테베 부근 덴도라 신전 천장에서 떼어낸 덴도라 성좌도 부조 작품이 프랑스로 들어온 것. 샹폴리옹은 히에로글리프를 해독, 스승 ‘드 사시’의 오류를 지적하고 이 작품의 정확한 연대를 밝혀낸다. 이 일로 그는 왕을 대신해 이탈리아 토리노로 가 이집트 유물을 감정, 구입할 기회를 얻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유물 컬렉션 책임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샹폴리옹은 이때야말로 이집트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프랑스 정부를 압박, 지원을 얻어내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이집트 행을 성사시킨다. 드디어 이집트에 도착한 샹폴리옹은 이집트 전역을 돌며 고대 신전과 왕궁 터, 묘역 등을 찾아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단순히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독을 통해 고대 이집트 문명을 새로이 조명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음 뒤의 삶을 믿고 영생을 꿈꾸었으며, 피라미드가 실은 거대한 부활의 우주선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모두 샹폴리옹의 공이었다. 그는 날로 쇠약해져가는 몸을 이끌고 연구에 매진하다가 결국 건강을 잃고 프랑스로 귀환한지 18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는 샹폴리옹에게 빚진 바 크다. 그의 업적은 인류 문명의 시초에 대한 시각마저 바꿔놓을 정도로 위대한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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