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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보도자료] 광복절 주간, 특집 다큐멘터리 대거 편성  
작성일 2011-08-11 조회수 11772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보도자료] 광복절 주간, 특집 다큐멘터리 대거 편성

 

관련사진은 EBS 사이버홍보실 하이라이트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BS, 광복절 주간 특집 다큐멘터리

 

 

대거 편성

 

 

81521:50~22:40 특집 다큐 <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

23:10~24:00 특집 다큐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 1부 미드웨이 해전

81621:50~22:40 특집 다큐 <침몰선, 잠든 역사를 깨우다>

23:10~24:00 특집 다큐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 2부 스탈린그라드 전투

81721:50~22:40 특집 다큐 <히로시마> 1

23:10~24:00 특집 다큐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 3부 쿠르스크 전투

81821:50~22:40 특집 다큐 <히로시마> 2

815~1920:45~20:50 <지식채널e> 그날의 기록

 

 

EBS가 광복절 주간을 맞아 다큐멘터리를 대거 편성했다.

 

EBS815일부터 18일까지 4일간, EBS가 제작한 특집 다큐와 해외 특선 다큐 등 다양한 프로그램를 방송한다. <지식채널e>는 광복절을 맞아 1945815, 한국 미국 일본 삼국의 신문 보도 내용을 들여다보는 그날의 기록을 방송한다.

 

815일 밤 950분에 방송되는 특집 다큐멘터리 <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은 김좌진 장군,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 항일독립투사들의 흔적을 뒤쫓아가며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김좌진 장군의 외손자, 송일국씨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816일 밤 950분에는 지난 4월 발굴이 시작된 침몰선이 담고 있는 진실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침몰선, 잠든 역사를 깨우다>가 방송된다. 100일간의 해저탐사 과정 , 중국과 일본에 잠든 과거 현장 등을 밀착취재해 침몰선에 묻힌 우리의 역사를 찾아간다.

 

17일과 18일 밤 950분에는 히로시마 원폭 당시 참여했던 승무원과 살아남은 피폭자들의 증언을 통해 역사의 현장을 되짚는 특집 다큐 <히로시마>2편 연속 방송된다. 세계 최초의 원폭실험으로 알려진 암호명 트리니티로부터 실제 원폭투하가 있었던 3주 동안,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결단이 이루어졌던 숨가쁜 과정 속에서 양측의 확연한 시각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

 

특집 다큐멘터리 3부작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밤 1110분에 방송된다. 3부작 다큐멘터리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향방을 가른 세 번의 전투, - 1;미드웨이 해전, 2;스탈린그라드 전투, 3;쿠르스크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전투 당시 양쪽 진영의 수장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이 구상해냈던 전략 전술을 분석하고 해설한다. 그들의 머리속에 오갔을 법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유추해보기 위해 현대의 장군들과 군사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해설을 듣는다. 군사전문가들의 해설과 무기의 화력을 비교하는 실험 등이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 <지식채널e>는 광복절을 맞아 1945815, 한국의 유일한 일간지였던(당시 민족지는 모두 폐간된 상태) 매일신보, 미국의 뉴욕타임스,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보도 내용을 들여다본다.

 

 

각 프로그램 주요 내용입니다.

 

 

특집 다큐멘터리 <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

 

방송 : 2011815일 월요일 2150~2240

연출 : 안태근 PD (010-6727-2243)

나레이션 : 송일국

 

끈질기게 이어져 온 민족혼의 생명력!!

우리의 민족혼은 과연 무엇일까?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상하이의 애국청년 윤봉길 의사

하얼빈 의거 안중근 의사

청산리역사대장정 대원들과 함께 항일독립투사들의 흔적을 뒤쫓아 가며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우리 민족혼의 특별함을 찾아 떠나는 여정!

오천년 한반도 역사에 면면히 이어온 민족혼.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라사랑의 정신인 민족혼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오천년 역사의 우리민족은 우리만의 고유한 얼을 가지고 있다.

선조들은 위기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워왔다 .

그 들불처럼 일어선 이름 없는 용사들이 있었기에 나라는 존립의 기로에서

살아날 수 있었고 그것은 민족혼이 되어 우리의 정신세계로 이어진다.

상하이 영웅 윤봉길 의사,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하얼빈 의거의 안중근 의사. 그들이 걸었던 길을 걸으며 그 역사의 현장에서 민족혼의 정신을

느껴보고자 한다.

 

청산리역사대장정! 민족혼 탐구의 생생한 현장!

사단법인 백야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의청산리 역사대장정을 동행 취재하여, 우리 민족이 5000년 동안 잦은 외세의 침략에도 자주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우리의 민족혼을 만나보았다.

지난 626일 충남 홍성군 용봉산 수련원에서 64명의 대학생을 비롯한 사회저명인사를 포함한 105명의 대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산리 역사대장정' 발대식을 갖고 중국으로 향했다. 200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0회를 맞고 있는 이번 역사대장정은 1011일간 고구려의 수도 졸본성과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발해 성터 등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한 후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오르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김좌진 장군 구거주지, 한중우의공원, 실험소학교, 윤동주 생가,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 저격 장소, 여순 감옥 등을 방문하여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독립선열들의 고혼을 느끼고 돌아왔다.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항일 투사들.

안타깝게도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흔적임에도 지금은 모두 중국에 위치하지만, 우리는 중국 대륙에 서려있는 우리의 민족혼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청산리독립전쟁승전기념비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나다.

청산리역사대장정 10기 대원들이 찾은 중국의 동북지방인 만주는 애국 독립선열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다. 김좌진 장군을 포함한 선구자들은 사재를 털어 만주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아직도 그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화룡시 청산리는 김좌진 장군 휘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되어 19201021일 부터 26일까지 일본군 5만여 명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완루구에서 시작된 전투는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고동하에 이르기까지 56일간 지속되었다.

그곳에 항일 투혼의 상징 청산리독립전쟁승전기념비가 우뚝 솟아있었다. 청산리독립전쟁승전기념비는 청산리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희생된 이름 모를 대한독립군의 넋을 기리고자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91년 전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다했던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의 항일 투쟁의 민족혼을 시공을 뛰어넘어 함께 느껴볼 수 있다.

 

충남 예산 윤봉길기념관에서 애국청년 윤봉길 의사를 만나다.

사람은 왜 사는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 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10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그의 민족혼을 그려 보았다.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처자의 사랑보다 윤봉길 의사에게 더한 사랑은 바로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윤봉길 의사의 생애, 애국에서 비롯한 목숨을 바친 업적, 그리고 그를 통해 대원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움트는 민족혼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여순 감옥에서 하얼빈 의거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

지난 6, 마지막 일정으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 감옥을 찾았다.

여순 감옥은 제정러시아가 1902년 설립, 일본이 확장시킨 것으로 중국 동북에서 가장 큰 감옥이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여순 감옥을 둘러 본 대원들은 안 의사가 수많은 붓글씨를 남기고, 책도 썼던 독방을 쇠창살 너머로 바라보았다.

박창현(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3학년) 대원은 안중근 의사는 말 그대로 의사라는 말이 어떠한 말을 표현하는 것인지 표본처럼 행해주신 분이라고 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나라를 걱정하는 헌신적 정신과 태도를 그의 순국지에서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안 의사는 순국을 앞두고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를 고국 땅에 묻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후손들을 위해 희생한 안 의사의 숭고한 민족혼을 기억하며, 우리는 그의 유언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특집 다큐멘터리 < 침몰선, 잠든 역사를 깨우다 >

- 방송 : 816() 950- 1040

- 연출 : 정영홍 PD

 

일제 막바지 2차 세계대전의 패색이 짙던 194572.

고군산반도와 선유도를 가로질러 일본으로 향하던 배 한척이 미군 폭격기에 의해 격침된다. 그 배와 함께 지난 60여 년 간 수많은 아픔과 사연을 간직한 우리 역사도 같이 묻혔다.

그러나 새만금 방조제의 세찬 물살과 첨단과학장비는 갯벌 속에 파묻혀 영원히 묻힐 뻔했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깨우기 시작했다!

 

20114월 침몰선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 배 한 척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보는 과거. 그리고 최초로 공개되는 충격적인 사실들!!

광복 66주년의 8..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잠든 역사가 깨어난다!

 

 

1. 군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배 한 척! 194572일엔 무슨 일이?

지난 4.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선 한 척이 발견됐다. 수심 18미터에서 발견된 이 배는 어디로 가는 배였길래 이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일까?

때는 19457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에서 반출한 각종 귀중품을 잔뜩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일본 배 한척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전한 미 해군 비행기에 폭격을 당하는데...!! 과연 이 배에는 무엇이 실려 있었을까? 첨단장비를 통해 이 배가 그 날의 그 배인지를 추적해나간다. 또한, 그 날 현장을 목격한 한 할아버지를 만나 그 날의 기억을 생생히 들어본다! 불바다가 된 처참한 현장... 기억 속에 남아있는 침몰선을 확인해본다!

 

2. 사라진 금 250톤의 비밀! 수탈의 역사.. 졸속 처리된 한일 수교협상

일제의 수탈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 일제는 우리나라 광산업에 종사하는 인력을 20만에서 70만명으로 급증시키면서 한반도에 대한 수탈을 가속화한다. 그 중 최대의 수탈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는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양의 금을 생산하고 있었다. 미국인이 소유했던 동양 최대의 금 생산지였던 평북 운산금광에서 유래한 노다지라는 말도, 한국인이 금광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노터치에서 유래되었을 정도.

 

당시 조선은행에는 현 시세로 13-14조원에 해당하는 금화와 금괴 250톤과, 현 시세 810억에 해당하는 은화와 은괴 68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재산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금을 조선은행에 쌓아놓고 이를 바탕으로 유가증권을 발행하던 금본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많은 금과 은 그리고 각종 문화재 귀중품은 1945815일 일제의 멸망으로 일본으로 돌아간 70만 명에 달하던 일본인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195110월 최초로 시작된 한일수교 협상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배상의 첫 번째 조건으로 제시한 것도 조선은행으로부터 반출한 250톤의 금과(현 시세 13-14), 은의 즉각적인 반환청구였다는 충격적인 사료가 공개된다.

 

3. 동전과 유골이 발견되기까지의 전 과정 현장 동행 취재!!

이 침몰선에서 중국 것으로 추정되는 동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발견의 순간부터 약 100일간의 작업에 일일이 동행한 제작진. 중국 주화가 5톤 이상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이 주화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사라진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선다.

주화가 연일 출토되는 가운데 침몰선에서 잠수부가 또 다른 충격적인 무엇인가를 들고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60여년 넘게 차가운 바다에 갇혀 이제 모두에게 잊힌 누군가의 유골! 과연 이 백골은 누구의 것일까? 일본 전몰자협회와 순직선원현창회에서 선박선문가의 증언을 토대로 66년전 그 날 침몰된 배를 복원시켜본다!

 

 

 

특집 다큐멘터리 < 히로시마 > (1, 2)

1: 817() 21:50 ~ 22:40

2: 818() 21:50 ~ 22:40

- 감독/제작자 : 폴 윔스허스트(Paul Wilmshurst)

- 작가 : 클레어 색스비(Claire Saxby), 폴 윔스허스트

- 제작 : BBC, TFI, ZDF, 디스커버리채널 공동제작

- 제작년도 : 2005

- Running time : 89

 

 

줄거리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 미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지만 일본 지도부는 이를 묵살한다. 결국 194586,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투하된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서 사용된 원자폭탄이었다. 원폭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통신센터이자 병참기지 역할을 하던 군사적 요충지로 일본군의 제2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89,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투하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은 6일 후인 815일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당시 에놀라 게이를 타고 히로시마 원폭에 직접 참여했던 승무원들과 살아남은 피폭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기념비적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본다.

 

주제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 현장에서 그 순간을 경험한 피폭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20만의 인명을 살상한 원폭투하는 과연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다큐멘터리 히로시마는 이렇게 진지하고 복잡한 질문을 던져놓는다.

세계 최초의 원폭실험으로 알려진 암호명 트리니티로부터 실제 원폭투하가 있었던 3주 동안,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결단이 이루어졌던 숨 가쁜 과정 속에서 양측의 확연한 시각 차이를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이 과연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 아니면 미국이 세계평화의 수호자였는지 제국주의의 종주국이었는지, 감독은 그 판단을 여전히 시청자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있다.

 

감독/제작자 폴 윔스허스트(Paul Wilmshurst)

폴 윔스허스트는 많은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감독이자 작가 겸 제작자다. 가출청소년과 아동학대를 다룬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았으며, 인기 범죄드라마 시리즈의 감독이기도 하다. 다양한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작품 : 산업계의 7대 불가사의 : 브루클린브리지 (Seven Wonders of the Industrial World: Brooklyn Bridge), 백인족(White Tribe), 오스카 굿맨의 초상(Mob Law: A Film Portrait of Oscar))

 

감상 포인트

다큐멘터리 히로시마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60주년을 기념해, 20058월 영국 BBC방송이 특집으로 편성해 방영한 다큐멘터리다. 특히 이 다큐멘터리는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자료화면, CG 작업을 통해 완성된 원자폭탄의 폭발장면 등을 이용해 당시 상황들을 드라마 형식으로 박진감 넘치게 재연했다. 2006년에 에미상 시상식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수상했다.

 

 

 

특집다큐멘터리 < 2차 세계대전의 명장들 >

원제 : Generals at War

방송일 : 815-17일 밤 2310

 

 

3부작 다큐멘터리는 제 2차 세계 대전 의 향방을 가른 세 번의 전투, 1;미드웨이 해전, 2;스탈린그라드 전투, 3;쿠르스크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194112,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인다. 일본의 기습에 타격을 입은 미국은 1942두리틀 공습을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하고, 이에 일본은 적잖이 당황하며 외해의 방어선을 더 멀리까지 구축하는 계획을 세운다.

일본군은 항모 기동 부대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미드웨이 주변 해역에 대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미드웨이 섬의 항공 전력을 파괴한 후, 지상군을 상륙시켜 미드웨이 섬을 점령한다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일본은 미드웨이를 공격하기 위해서 알류산 열도를 함께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고, 지난 번 진주만 공격 당시 놓쳤던 미국의 항공모함들을 모두 잡아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 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이 작전에는 문제가 있었다. 미군은 이미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했고, 일본군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미군은 반전을 노린다. 미국의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은 자신 휘하의 항공모함 3척을 미드웨이로 보내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린다.

 

19428월 독일군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작전인 소련 침공을 개시하는데 이것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시작이다. 독일군의 원래 목표는 소련의 유전이 모여 있는 캅카스 (:코카서스) 지방을 공격해서 석유 공급을 끊는 것이었는데 스탈린이란 이름이 붙은 도시를 지도에서 없애고 싶은 히틀러의 욕심이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결과는 독일군의 패배였다. 뜻하지 않게 유혈 낭자한 근접전에 말려들은 독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소련의 맹추위가 예상보다 혹독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연승 행진을 했던 독일군의 진격에 처음으로 제동이 걸린 것이다.

다음 해 여름,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의 치욕을 씻기 위해 독일군 최고의 책략가인 프로이센 출신의 장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수장으로 세워 복수전을 구상한다. 만슈타인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으로 군대를 나눠서 쿠르스크라는 평원 지역을 포위한 후, 기갑대의 협공 작전으로 소련군을 섬멸한다는 작전을 내놓는다. 당시 무적의 타이거 전차의 개발에 열광한 히틀러는 공격 시기를 몇 달 연기하는데 이것은 독일군의 패배에 주요 요인이 된다. 소련군 수장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 최고 사령관 대리는 그 몇 달을 이용해서 적 전차의 진격을 막는 사상 최대의 방어 공사를 민간인까지 동원해서 벌였던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전투 당시 양쪽 진영의 수장들을 등장시켜서 그들이 구상해냈던 전략 전술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중장과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이고 벌지 전투는 발터 모델 독일군 장군과 오마 브래들리 미군 장군, 쿠르크스 전투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독일군 육군 원수와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 사령관 대리이다. 당시, 이들의 머리 속에 오갔을 법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유추해보기 위해 현대의 장군들과 군사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그들의 해설을 함께 듣다. 군사전문가들의 해설과 무기의 화력을 비교하는 실험 등이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1: 미드웨이해전

194112,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인다. 일본의 기습에 타격을 입은 미국은 1942두리틀 공습을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하고, 이에 일본은 적잖이 당황하며 외해의 방어선을 더 멀리까지 구축하는 계획을 세운다.

미국의 최전방 기지는 미드웨이 섬으로 이곳에는 미국 해병대와 해병항공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무장을 확충하는 중이었다. 일본은 이곳을 점령하여 일본의 최전방 기지로 삼고, 예상되는 미국의 일본 본토 공격을 저지할 거점으로 삼고자했다.

이에 일본군은 항모 기동 부대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미드웨이 주변 해역에 대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미드웨이 섬의 항공 전력을 파괴한 후, 지상군을 상륙시켜 미드웨이 섬을 점령한다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그 작전의 선봉에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있다.

일본은 미드웨이를 공격하기 위해서 알류산 열도를 함께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고, 지난 번 진주만 공격 당시 놓쳤던 미국의 항공모함들을 모두 잡아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 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이 작전에는 문제가 있었다. 미군은 이미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했고, 일본군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미군은 반전을 노린다. 미국의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은 자신 휘하의 항공모함 3척을 미드웨이로 보내 매복시키고 나구모를 기다린다.

 

2: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16월 히틀러는 소련 침공이라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의 소련 침공 1차 목표는 캅카스(:코카서스) 지방의 유전을 탈취해서 석유 공급을 끊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3백만이란 대군을 이끌고 소련 국경을 밀고 들어와서 블리츠크리그: 전격전이라는, 이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전격전은 번개 같이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전쟁이란 뜻으로, 일단 전선의 취약한 부분을 폭격기와 대포로 공격하고 적이 당황한 틈을 타 속도가 빠른 전차로 방어선을 돌파하고, 그 다음 기갑대가 적을 포위해 버리는 전술이다. 이런 방법으로 독일군은 3주만에 소련군 2백 만 명을 죽이고 소련 중심부로 천 킬로미터나 진군한다. 캅카스의 유전들이 눈앞에 보이자 히틀러는 돌연 마음을 바꿔 군대의 절반을 북쪽으로 올려 보내고 스탈린그라드 침공 야욕을 불태운다. 스탈린그라드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세계지도에서 지우는 것이었다. 이 임무에 히틀러가 선택한 인물은 당시 50세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중장이었다. 그는 전쟁의 지휘관이라기 보단 후방에서 참모 역할을 많이 한 인물이었는데 히틀러가 그를 제6군의 수장으로 전격 승진시킨 것이다. 반면, 이를 상대할 소련군 수장은 당시 42세의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군의 전격전에 제동을 걸기 위해선 너른 평원이 아닌 도시에서 근접전을 벌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적을 시내로 유인했다. 적을 껴안고 뒹굴면서 비열하고 추잡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이 추이코프의 특기였기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는 애당초 독일군에게 불리한 전쟁터였다. 후방이 볼가강으로 막혀있기 때문에 기갑대의 포위 작전이 먹혀들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엄청난 폭격으로 스탈린그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만 도시의 건물 잔해들 사이로 숨은 소련군을 완전히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역사상 가장 유혈 낭자했던 근접전이 시작되고 독일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또한 11월부터 시작되는 러시아의 맹추위에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독일군은 점점 더 힘이 빠진다. 194211월 중순, 소련군은 남북 협공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23일에는 파울루스의 군대를 포위했다. 독일군은 이들을 구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파울루스는 항복 의사를 표명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켜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은근히 강요하지만 이듬해 131일 파울루스는 소련에 항복하고 살아남은 독일군 91000여 명도 투항한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22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함으로써 수세에 몰리고 소련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반격함으로써 전황이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 쿠르스크 전투

1943년 여름,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뒤로 하고 다시 한 번 소련 침공의 계획을 세운다. 히틀러가 이번에 선택한 인물은 독일군 최고의 책략가로 알려진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였다. 그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여러 장군들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명장이었다. 만슈타인은 자신의 부대를 남군과 북군으로 군대를 나눠서 각각 전선을 돌파한 후, 쿠르스크에서 협공 작전을 펼치기로 계획한다. 한편, 소련군의 수장을 맡은 인물은 게오르기 주코프 최고 사령관 대리였다. 그는 가난한 촌락에서 자라 19살때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개 병사로 징집된 후 밑바닥 계급부터 밟고 올라온 인물이었다. 양측의 수장은 배경도 대조적이었지만 전투 방식도 정반대였다. 만슈타인은 전차와 폭격기를 앞세워 적진을 돌파한 후 빠른 속도와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는 전격전의 대가였다. 반면 주코프는 방어 전술로 적의 힘을 빼고, 때를 기다렸다가 역공을 펼치는 전술을 좋아했다. 독일군은 병기를 개발하는 기술면에서 소련에 앞서 있었고 소련군은 군수물자와 병사를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독일군의 수장, 만슈타인은 타고난 군인의 직감으로 공격 개시를 서둘렀지만 신무기 개발에 매료된 히틀러는 몇 달을 더 기다리더라도 타이거 전차를 최전선에 세우고 싶어 했다. 여기서부터 독일군의 패배가 예견된다. 소련군 수장 주코프는 독일군이 머뭇거리는 몇 달 사이에 주도면밀한 방어 전략을 세운다. 사상 최대 규모의 참호를 파고 대전차용 지뢰를 설치해서 독일군이 전격전을 시작도 못하도록 전장을 바꿔놓은 것이다. 또한 무적의 타이거 전차를 무력화하기 위해 기동력과 민첩성을 갖춘 티34라는 전차를 개발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비린내 나는 기갑전을 벌인다. 인명 손실은 소련군 쪽이 컸지만 결국 독일군은 전투에서 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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