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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큐프라임' 무원록 - 조선의 법과 정의  
작성일 2011-10-13 조회수 12054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보도자료] <다큐프라임> 무원록 조선의 법과 정의

관련사진은 EBS 사이버홍보실 하이라이트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조선시대의 살인사건 수사법

 

 

EBS <다큐프라임> 무원록 조선의 법과 정의

 

 

1부 억울함을 없게 하라

 

2부 자살과 타살

 

3부 법, 최소한의 정의

 

방송일시 : 20111017() ~ 19() 950~

 

연출 : 이주희 PD (010-2608-8714)

 

 

법과 정의(도덕)는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가치들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멈춰진 적이 없다. 조선시대에 있어 법과 정의를 논할 때 주목할 것이 바로 무원록(정확히 증수무원록대전)이다.

무원록(無寃錄)이란 이름 그대로 없을 무()에 원통할 원()자를 써 원통함이 없도록 하는 책으로, 조선시대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무원록에 근거해 사건을 수사할 수 있도록 조사하는 방법을 기록한 책이다. 살인사건의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리기 위해 우선 검시를 해야 하는데, 무원록은 그 검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소개한 검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EBS <다큐프라임> ‘무원록-조선의 법과 정의는 조선시대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통해 형사사건의 처리과정을 담은 다큐드라마로,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올바른 법집행의 원칙과 정의를 살펴본다.

 

조선을 대표하는 명군인 세종, 영조, 정조는 무원록을 한국화 재편집 보강하는 등 법의학 발전과 형사법체계의 정립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 국가를 건강하게 이끌어 백성의 삶을 보장하는데 있어 공정한 법집행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법과 정의는 어떻게 지켜졌을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없는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을 어떻게 수사했을까? 진실을 철저하게 밝히기 위해 군주(법 집행자)의 정의관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정약용이 저술한 형법서인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조선시대 최악의 패륜사건 중 하나로 꼽은 것이 바로 평산 박조이 살인사건이다. 정조는 확실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암행어사 이곤수를 출두시키고, 이곤수는 무원록을 토대로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초검과 복검에서 자살로 판명 났던 박조이 사건이 암행어사 이곤수로 인해 타살로 뒤집히게 되는데, 숨막히는 반전스토리가 여기에 있다. 합리적인 형사제도와 과학적인 수사기법,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간(법 집행자)의 의지를 중점으로 내용을 담아냈다.

 

1억울함을 없게 하라에서는 실제 사건인 평산 박조이 살인사건을 토대로 검시과정과 검시제도에 대해 알아본다. 또 초검과 복검, 의혹이 있을 경우 삼검, 사검을 불사했던 조선시대의 형사제도를 들여다본다. 이를 위해 황해도 평산의 박조이 사건의 수사 시작 시점부터 초검, 복검, 심문 등을 자세히 살핀다. 아울러 검시법의 기본과 검안 작성법, 각종 검시도구 및 검시에 참여하는 각 구성원의 역할 등도 확인할 수 있다.

2자살과 타살에서는 평산 박조이 사건과 무원록의 내용을 오가며 자살과 타살을 구별하는 조선 법의학의 과학적 수사기법을 알아본다. 한편으로는 평산 박조이사건이 자살에서 타살로 뒤집혀지는 과정이 드러나며 다른 한편에서 각각의 사인(익사, 목졸림, 자상, 독살 등)에 따라 무원록에서 어떻게 자살과 타살을 구분하였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3, 최소한의 정의는 법집행에 있어서 공정성을 위한 조선시대의 사법정신 즉 인간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추상적으로는 너무나 분명한 법과 정의가 인정, 상이한 도덕률, 권력이나 이해관계의 개입으로 인해 현실에서는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지를 평산 박조이 사건으로 재구성한다.

 

조선시대에는 매우 과학적 수사기법을 사용해 형사사건을 처리했는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고초(강한 식초)반응이다. 범인이 칼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살해 후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놓거나, 칼이 오래 방치돼 핏자국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때 칼에 고초를 발라서 숯불에다 달구면 빨갛게 피의 흔적이 나온다.

상흔을 찾는 방법으로는 파의 밑동, 술지게미(곡식으로 술을 빚은 후에 술을 짜내고 난 남은 술 찌꺼기), 초주를 사용했다. 시신이 구타를 당한 상처를 찾기 위해 우선 시신을 씻고 그 위에 술지게미나 초를 종이에다가 뿌려서 얼굴에 덮고, 또 의복에다가도 초를 뿌려 한 시간 정도 두었다가 걷어 보면 표피가 벗겨져 상처의 흔적이 나타난다. 시체의 상처가 있는 피부가 주변의 흙이나 주변의 동물 등에 의해 훼손되면 색깔을 구별하기가 어려운데, 그때 표피를 벗겨내면 진피의 상흔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독살감별법으로는 은비녀법과 반계법이 있다. 은비녀법은 독살일 경우 시신의 목구멍 속에다 은비녀를 넣었다가 꺼냈을 때 은비녀의 색이 검게 변하게 되는데, 다시 그 은비녀를 조각수로 닦았을 때도 검은 색이 변하지 않으면 독살이라고 판단했다. 은은 질소나 인 화합물에 반응을 해서 색이 검게 변하는데, 대부분의 독극물이 질소와 인을 함유하고 있어서 은에 반응하면 색깔의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편 은비녀에 잡물이 들어가게 되면 조금만 닿아도 쉽게 변형이 되기 때문에 검험에 사용되는 은비녀는 최고급 순은으로 특수 제작되며, 관에서 따로 보관했다가 전적으로 검험 용도로만 쓴다. 당시에는 잡물과 혼합된 가짜 순은비녀가 많아, 검험할 때 순은으로 된 은비녀를 사용하라는 명이 내려지기도 했다.

또 반계법은 시신의 목구멍 속에 백반을 한 덩이 넣어 한지로 덮어 두었다가 얼마가 지난 후에 백반을 꺼내서 닭에게 먹여서, 닭이 죽으면 독살이라고 판단하는 방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영조 연감에 증수무원록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반계법을 쓰고 나서, 그때 죽은 닭을 주민들이 먹고 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반계법을 금지하는 명령을 법으로 내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검험할 때 사용하는 이색적인 법물로는 우산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검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시체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다. 주로 햇빛 아래서 시신을 확인 했으므로 강력한 햇빛으로 인해 상처가 잘 안보이거나 색깔을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때 우산을 사용해 강한 직사광선을 차단함으로써 정확한 시신 확인을 하는데 용이하도록 했다.

 

이처럼 이 조선시대에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법의학 체계와 더불어 과학적 수사기법을 통해 형사적으로도 상당히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군주(법 집행자)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사건에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등 큰 폐단이 생길 수 있었다.

박조이 사건을 통해 당시 최고 통치자인 정조의 정의관을 엿볼 수 있는데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사건의 내막이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었다. 정조는 자신이 심리록 이라는 재판 판결집을 직접 편집했을 정도로 살인사건의 조사에 매우 신중함을 기했다. 그는 스스로 암행어사들을 파견해 사건을 재조사 했으며,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영조 때 까지는 금지됐던 굴검(시체를 파내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범인들이 일부러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일찍 묻는 등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정조는 사회문화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조는사건이 제대로 조사되지 않는다면 봉분(무덤)을 파헤쳐서라도 검시를 해야된다라는 것을 명시했을 정도로 정확한 조사를 통해서 진범을 가리고, 과학적인 범죄규명을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심리록에서 의심스러운 일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희생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남겨 사람의 목숨의 소중함과 정확한 수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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