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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故 신상옥 감독 특집 다큐 - 미공개 독점 인터뷰 공개  
작성일 2006-05-02 조회수 20959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故 신상옥 감독 미공개 독점 인터뷰 공개 EBS, 신 감독 추모 특집 다큐 “거장 신상옥, 영화를 말하다” 방송
<방송일시 : 2006년 5월 6일 밤 8시 30분 - 10시 >
문의 : 안태근 팀장 (017-727-2243)
O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주옥같은 영화들을 연출․제작한 고 신상옥 감독의 화려한 이력은, 그가 왜 한국영화계의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山으로 불리 우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 최초로 세계 100대 감독에 선정 된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TV 방송을 통해 추모 특집으로 그의 영화 두 편이 소개된 게 전부이다. EBS는 신상옥 감독이 한국영화계에 남긴 무수한 업적을 다시 한번 기리고자, 어느 방송에서도 하지 않은 특집 다큐멘터리를 5월 6일 저녁 8시 30분부터 90분간에 걸쳐 방송한다. 이번 특집에서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세계와 2001년에 촬영 된 3시간 분량의 미공개 독점 인터뷰가 축약돼 최초로 공개된다. O 그의 화려한 이력의 이면에는 이에 못잖은 수많은 고난들이 서려 있다. 60년대 우리나라 최대 영화사인 신필름의 허가취소, 납북, 그리고 탈북 등 수많은 고난을 겪지만, 그 와중에서도 꾸준히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주옥같은 작품을 내놓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몸 바친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O 그의 영화 앞엔 항상 ‘최초’ 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성춘향>은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컬러시네마스코프를 시도했으며, <쌀>에서는 250mm 줌렌즈를 처음 도입하였고, <연산군>에서는 최초로 동시녹음을, <빨간마후라>는 모험적인 특수촬영으로, 한국영화기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는 1978년 납북 때부터 1986년 탈북하기 전까지 북한에서 <탈출기>,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심청전> 등 총 7편의 영화를 제작 및 감독했다. 그 중 <탈출기>는 그가 북한에서 작업한 영화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O 1986년 탈북 후에는 미국에서 머물며 영화 활동을 계속 해, 1994년에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2000년 영구 귀국한 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와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북한에서 얻은 간 질환으로 인해 2006년 4월 11일 80세를 일기로 그의 영화 같은 삶에 막을 내리게 된다. O 한 영화인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집념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납북, 탈북, 이후 할리우드까지 진출하여 흥행에 성공하고 영구귀국 하기까지 그의 일생은 흥미진진한 한 편의 영화였다. 이번 특집 방송은 그런 신상옥 감독의 영화세계와 파란만장한 인생담을 그의 생생한 육성으로 들어 보실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주요 인터뷰 내용> <영화 이전 시절> “영화를 좋아했지만 직접 영화 공부를 할 수 있기는 어려워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미술 공부, 국내 중학교 졸업 후 일본의 도쿄미술전문학교를 다니다가 귀국하여 영화를 시작하기로 결정” <영화 입문 계기> “최인규 감독을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 영화 시작” <영화 입문 시절> “처음에는 영화에 대해 몰랐으므로 맡은 일은 최인규 감독의 요구대로 세트를 만드는 미술감독” <영화 ‘자유만세’> "일본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기술로 만든 첫 영화이자 해방 후에 한국 영화를 클로즈업시킨 첫 번째 작품”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惡夜)’> “최인규 감독에서 독립하여 만든 첫 번째 영화로 원작 소설의 작가는 김광주씨(소설가 김훈씨의 부친), 미군이 진주해 있는 해방 공간에서, 양공주가 들려주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과 추악한 사회 현실, 1949년에 촬영하였으나 이듬해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어렵게 녹음 편집하여 1950년 부산 부민관에서 개봉” <미술 공부와 영화> “공부한 회화가 움직이는 그림은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 때 상당히 도움” <영화 입문 시기의 상황>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들이 고민한 것은 ‘작가정신’” <1960~1970년대> “여러 장르의 영화가 등장하던 때로, 제작 기술력만 있으면 뭐든지 소화할 수 있었던 한국 영화의 황금기” <생년월일> “1926년 음력 9월 12일, 양력 10월 18일” <나운규에 대하여> “‘아리랑’은 작가정신이 대단한 작품. 흥행을 위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어도 그는 특별한 영화인” <최인규 감독에 대하여> “제작 기술 능력은 탁월하였으나 시나리오에 따라 작품성이 달라지는 한계 노출” <데뷔작 ‘악야’를 만들 때의 생각> “영화의 관건은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 보다 ‘작품성’” <데뷔 영화 ‘악야’의 성격> “양부인을 소재로 한 영화로 사회성 있는 작품” <부산에서 개봉한 ‘악야’> "극단 신협(新協)의 단원들이 와서 보고 감격한 영화. 반면에 반응이 시큰둥했던 대배우 최은희씨” <당시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주연한 작품> “새로운 맹서(1947년), 밤의 태양(1948년), 마음의 고향(1949년)” <제작비 조달 방법> “북한의 김정일과 남한의 박정희 정권에 의한 영화 이외에는 자력으로 제작비 마련” <부친에 대하여> “부자셨던 아버지는 막내아들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반대” <이름을 바꾸다> “본명이 ‘신태서’였는데 영화를 위해 필요하다며 최인규 감독이 바꿔준 이름이 ‘신상옥’” <당시 촬영까지 직접 맡은 이유> “그림 공부를 했기 때문에 화면을 보는 눈이 좋았으나 카메라맨과 타협하다가는 시간과 제작비 낭비였으므로, 찍은 필름을 일본으로 보내서 현상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할 방법이 없어 직접 촬영” <촬영을 배우다> “최인규 감독이 가르쳐 준 촬영과 편집 기술” <촬영을 배우다> “미국공보원(USIS)이 최인규 감독의 영화사에 작품 제작을 의뢰하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35mm 카메라” <무거운 미첼 카메라의 추억> “고려영화협회 5층 좁은 계단으로 여러 명이 힘겹게 날랐지만 만지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카메라” <훈련으로 배운 영화의 기초> “최인규 감독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기계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니 기초를 잘 알라”며 훈련 강조“ <최인규 감독의 열정> “미첼 카메라를 미국공보원(USIS)에 돌려주기 전, 분해 조립할 정도로 적극적이어서 영화 카메라에 대해 잘 알아” <미국에서 제작한 '닌자 키드'> “존 터틀타웁은 (미국) 신프로덕션에서 ‘닌자 키드(3 Ninjas)’를 감독한 이후 유명해져, 1993년 개봉한 ‘닌자 키드(3 Ninjas)’는 그 해 미국에서 제작비로 대비할 때 가장 흥행시킨 영화” <미국에서 여론 시사를 거쳐 개봉한 영화> “영화 관람 계층의 사람들을 모아 시사하여 '액설런트(Excellent)' 평가가 90% 이상 나와야 개봉” <왜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는가> “나의 영화는 대중과 타협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결과” <배우 캐스팅에 대하여> “배우를 누구로 결정하느냐는 그 영화의 70% 정도에 이를 정도로 중요” <감독의 역할> “감독은 대화로 교통을 정리하는 사람일 뿐이지, 배우의 연기를 지도해서는 안 된다.” <배우를 자유롭게> “배우가 카메라를 따라 다녀야 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배우를 따라 다녀야” <북한에서 받은 제약> “인천 월미도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옥중에 계속 갇히기도” <배우가 자유로운 영화> “배우를 감독의 생각 틀 안에서 움직이라고 하는 주문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찰리 채플린은 최고의 예술가> "제작, 감독, 배우, 음악까지 자기가 했으므로 이상적인 영화 예술가형" <‘개화당 이문’의 나운규 감독>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도 영화 ‘개화당 이문(異聞)’으로 갑신정변의 김옥균을 보여줬으므로 대단하다고 평가”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은 일제에 강점 당한 민중의 울분과 심리를 잘 표현” <나운규의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 “작가정신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촬영 연출의 기술 측면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대단” <영화의 예술성과 오락성> “영화는 대중과 같이 있는 것이므로 예술성과 오락성을 겸해야 하는데, 예술성이 강하면 오락성이 자연히 붙는다.” <사회성을 강조한 영화 ‘상록수’> “외국인들은 봐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보여주지 않았는데 막상 보더니 이렇게 좋은 영화도 있냐며 호평을 받았다.” <예술성이 짙은 영화> “나는 완벽한 예술을 못해서 이루지 못했지만,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면 흥행에도 성공할 것이다.” <영화 ‘쌀’> “박정희 정권에 동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외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신랄한 사회 비판을 하면서도 재미를 주는 영화로서 가장 이상적인 영화 형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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