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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특집 <통일의 노래, 겨레의 노래>  
작성일 2004-06-11 조회수 27496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동요 <우리의 소원>에 담긴 반세기 한반도사''
EBS,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특집 <통일의 노래, 겨레의 노래>
방송 : 6월15일(화) 밤 8:50 ~ 9:40
담당 : 조혜경 (526-2558 / 011-463-1519)

EBS는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특집 프로그램 <통일의 노래, 겨레의 노래>를 방송한다.
특집 <통일의 노래, 겨레의 노래>는 동요 ''우리의 소원''이 통일을 염원하는 겨레의 노래가 되기까지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보여준다. 어린이 동요로 시작해 이제는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통일의 노래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이 노래 한 곡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한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이 곡의 작곡가인 안병원의 증언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계기와 칠천만 겨레의 노래가 되기까지의 과정, 나아가 반세기 한반도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낼 것이다.
▶ 6.15 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특집 <통일의 노래, 겨레의 노래>
'' 우리의 소원''은 1947년 중앙방송국(현 한국방송 전신) 3.1절 특집 노래극의 삽입곡으로 만들어진 동요로, 원래의 내용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군정시절이었고 신탁통치 얘기가 오가는 시절이었기에 진정한 독립을 원했던 당시 사회민심을 대변한 노래이다. 중앙방송국에선 ''우리의 소원은 독립''특집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화가이자 문인, 영화인, 연극인, 언론인으로 이름난 안석주(호: 석영)에게 대본을 의뢰하고 그의 아들 안병원(당시 서울음대 재학 중)에게 ''우리의 소원''작곡을 맡긴다. 결국 ''우리의 소원''은 중앙방송국의 기획아래 만들어진 동요였다. 안병원은 해방이후 <봉선화 동요회>라는 어린이 노래회를 만들어 해방 후 우리 동요보급에 열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사가 안석주는 일제 말기에 일제와 결탁해 영화를 만들고, 해방 후 그 사실을 괴로워하다가 ''우리의 소원''을 남기고 1950년 세상을 떠난다.
안석주의 사망 후, 작곡가 안병원은 중앙방송국으로부터 아버지 안석주가 만든 노랫말ꡐ우리의 소원은 독립ꡑ에 곡을 붙여줄 것을 주문받고 친구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한 교회에서 ‘우리의 소원’을 만든다. 당시 가난한 예술가의 집안에 풍금이 있을 리 만무, 풍금을 만지려면 그 교회에 가서 도둑고양이처럼 풍금을 만져야 했다. 좋은 곡을 만들기 위해 매일 새벽 기도를 하던 일주일 뒤 그에게 영감이 떠오르면서 짧은 시간 안에 한 자리에서 ''우리의 소원''과 ''구슬비''를 작곡한다.
48년, 분단 상황에서 남한만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지자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뀌어 불려지기 시작했다. 50년, 노랫말을 만든 안석주가 병사하고 몇 달 뒤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안병원은 3.1절 특집을 성공리에 끝낸 공로로 중앙방송국 음악담당PD로 일하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자 <봉선화 동요회> 어린이들을 이끌고 부산으로 피난한다. 당시 부산에서는 해운대 부두로 들어오는 유엔군을 환영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불려졌고 한국전쟁 이후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년간 미국 순회공연을 하던 중에도 이 노래가 들어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권은 ''우리의 소원''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싣고 그 후 전 국민이 어린 시절, 한 번씩은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걸어 북진통일을 표방했고,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선성장, 후통일 정책을 표방한다. 물론 남북적십자회담 등 통일을 향한 시도와 정책을 사용하지만 멸공을 외치던 군사독재시절에 ''우리의 소원''은 감동보다 의무적으로 불려져야 했다. 가사 역시 네 차례에 걸쳐 수정을 하고서야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우리의 소원''이 된 것이다.
1970년 중반, 교과서 속의 ''우리의 소원''은 민중가요로 다시 태어난다. 긴급조치9호가 발동되고 왜색을 일소한다는 명분아래 금지곡이 되는 노래가 많아지자 대학가에선 ''우리의 소원''을 개사해서 부르기 시작한다. 운동권에 널리 알려지던 ''우리의 소원''은 80년대 중반 가수들에 의해 음반에 실리기도 하는데 당시 정부는 가수들의 음반에 건전가요를 넣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 그 때 록 밴드 1호인 들국화와 정태춘은 ''우리의 소원''을 건전가요로 넣기도 했다.
그렇게 민중가요로 일반에 유포되던 ''우리의 소원''은 1989년 임수경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겨레의 노래로 불려지게 된다. 제13차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남측 대표로 참여한 임수경은 ''우리의 소원''을 목 놓아 부르고, 그 후로 북측은 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불려지도록 독려한다.
한편,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간 안병원은 동요가 없고, 친구가 없는 세상을 외로워하며 후회에 빠진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90년 어느 날 안병원은 한국정부로부터 ''남북통일전통음악회''의 지휘를 부탁받고 ''우리의 소원''의 지휘를 맡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모국의 무대에서 지휘봉을 다시 잡은 것이다.
2000년 6월 남북정상이 한 자리에 앉게 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다. 평화통일로 가는 씨앗을 뿌린 남북정상회담 환송파티에서 남북대표들은 하나가 되어 ''우리의 소원''을 부름으로써 이 노래가 겨레의 노래가 되었음을 입증한다.
2004년 5월, 안병원은 일제시대 ''반달’을 시점으로 한, 한국창작동요 8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우리의 소원''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아직 통일은 오지 않았다. 갈라진 세월은 너무 길고 분단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언젠가는 시효를 다 해야 할 노래지만 분반 반세기가 넘은 오늘, 한반도 현대사 속에서 온갖 역풍을 맞으며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해온 ''우리의 소원''. 이제 그 두터운 분단의 장벽을 넘어 남과 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첨부파일 첨부파일615특집-우리의소원-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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