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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일절 특집 앙코르 '시대의 초상' 위안부라 하지 마라- 이용수  
작성일 2008-02-28 조회수 15872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3.1절 특집 앙코르 방송 『시대의 초상』위안부라 하지 마라-이용수 美 의회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 증언자 이용수 할머니의 한맺힌 과거와 심적 고통 담아 “‘종군 위안부’ 아닌 ‘강제 위안부 피해자’로 정정해야”
방송 : 3월 1일 밤 9시 10분 ~ 10시
담당 : 편성기획팀 이창용 PD (526-2560)
“성은 ‘위’씨고, 이름은 ‘안부’가 아닌, 내 이름을 걸고 당당히 인터뷰 하고 싶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27일 발표한 '올해의 여성운동상'이 199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며 시작돼 800회 넘게 이어져온 '수요시위'에 돌아갔다. 3.1절을 맞아 EBS에서 방송하는 인터뷰 다큐의 주인공인 이용수 할머니는 미 의회 사상 최초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증언자로 나가 일본의 만행을 고발한 주인공으로, 지금까지 줄곧 수요시위 현장을 지켰다. 이용수 할머니는 3.1절 특집 앙코르 EBS 『시대의 초상』에서 심층 인터뷰를 통해 한 맺힌 과거뿐 아니라, 피해자로 신고한 후에 느껴야 했던 후회와 수요시위를 하면서 겪는 심적 고통을 진솔하게 털어 놓는다. 이용수 할머니는 “성은 ‘위’씨이고 이름은 ‘안부’인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 석자 ‘이용수’로 『시대의 초상』에 나와 당당하게 인터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대의 초상』위안부라 하지 마라 - 이용수 편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을 카메라로 들여 봤던 기존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프로그램에서 탈피, 나레이션 없이 단 한 명의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만으로 50분 동안 진행되는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프로그램으로, 제 20회 한국PD대상 ‘실험정신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진을 인터뷰 장소에 배치, 인터뷰 도중 이용수 할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 망자가 된 동료 피해자 할머니들을 사진으로 불러내 대화를 나누는 색다른 인터뷰 방식을 시도한다. “‘종군 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로 정정해야” ‘위안부’ 라는 말의 뜻을 처음 알았을 때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을 ‘위안부’라 부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고 했다. “내가 왜 위안부입니까? 설명해봐라 니들이! 내가 왜 일본군 따라 다니면서 일본군 즐겁게 해주고 섹스를 해줬다는 겁니까” 라며 “종군 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로 정정해야 한다고 위안부 호칭에 대한 문제 제기를 먼저 하고 나섰다. 강요에 못 이겨 ‘하루에 적게는 20명 많게는 70명의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리 중에도 일본군을 받아야’ 했으며 요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칼로 가지고 쭉쭉 째는’ 잔인한 폭력과 죽임까지 당해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자의로 몸을 팔았다는 뜻을 지닌 ‘위안부’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다. “아베가 왜 부시한테 사죄를 합니까? 나한테 무릎 꿇고 빌어야지” 지난해 2월, 미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했던 이용수 할머니는, 4월 27일 아베 일본 총리의 방미 당시 벌어졌던 어이없는 사죄 해프닝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저한테 무릎을 꿇고 빌어야지 아베가 부시한테 왜? 부시가 뭐예요? 아이고 참 웃기는 인간” 이라고 거침없이 일갈하고, 스튜디오에 걸려 있는 동료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진과 대화를 나누며 “아베가 부시한테 가서 빌었단다. 당신은 우예 생각하노? 미친놈 아닌가 하네” 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끌려가는 배 안에서 순결 잃고, 위안소서 전기고문까지 당해...“ 1944년 10월, 당시 16살이던 이용수는 저녁에 집 밖에 나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대만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까지 끌려갔다. 끌려가며 “엄마, 엄마... 이 사람들이 나 죽일라 한다, 엄마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던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한 그는 “대만으로 끌려가는 배에 일본 해군 300명과 조선 처녀 5명이 타고 있었으며 끌려가는 배 위에서 이미 순결을 잃고 처참하게 몸을 유린당했다”며 당시 악몽을 털어놨다. “문옥자야 너는 어떻게 끌려갔노? 강덕경이 너는 어떻게 끌려갔냐? 다들 얼마나 억울하노”라며 사진 속 피해자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던 그는, 일본군이 주둔하던 대만 위안소로 끌려갔을 때 일본군 받기를 거부했다가 ‘죽인다’는 협박과 함께 칼로 몸을 찢기고 전기고문까지 당했던 이야기를 할 땐 차마 말을 잊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98년, 자신이 끌려갔던 대만의 위안소(지금은 대만 식죽 공군기지) 현장을 찾아갔던 이유를 묻자 “가슴 아픈 게 문제가 아니고 자꾸 일본이 망언을 하니까 확인을 더 확실히 해야지”라고 대답해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사람들이 내 과거를 알았다는 생각에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말 못하겠더라고요. 엄마한테도 누구한테도 말 안했어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과거를 45년동안 가슴에 묻고 살았던 그는, 故김학순 할머니가 91년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을 한 후, 자신도 피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를 했다. 그러나 “막 미치겠어요. 사람들이 전부 다 내 과거를 알았는데 어떡해요? 죽어버리고 싶은 생각 밖에 없던데요” 라며 신고 후 감당하기 어려웠던 심적 고통을 털어놨다. ‘기억이 싹 되살아나는데 감당을 못하겠더라고’ ‘사실 열두번도 더 후회했어’ 피해자 할머니들이 증언을 한 후에 겪는 고통이 과거의 상처보다 더 감당하기 힘들 때도 많다며 특히 “뭐하러 나오나? 돈 받을라고 나오나?” 라는 말도 듣는다며 할머니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도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빠짐없이 나가는 이용수 할머니는 사실 “제일 괴롭고 부끄러운 게 수요시위에 나가 앉아있는 일”이라며 “시위 현장을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고개를 바싹 들고 흔들거리고 갈 때 는 ‘에라 이 나쁜 놈’”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며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최초 증언자였던 故 김학순 할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던 그는 “김학순씨, 아무리 아프다캐도 누가 이 속을 알겠소. 정말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쵸?” 라며 긴 한숨을 자아냈다. “200살까지 살아서라도 일본하고 꼭 끝을 내야지” 아직도 계속되는 일본의 망언을 들을 때마다 “이 개같은 놈아 난 조선의 딸이다. 너희가 짓밟고도 사죄 안하는 이유가 뭐냐” 고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는 그는 피해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실 때마다 억장이 무너진다며 “할머니들 죽기만을 기다리는 더러운 인간들 앞에서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200년 살아가지고 즈그가 먼저 디지는 걸 내가 볼 겁니다” 라고 일침을 놨다. “거기 일본 카메라 있습니다. 대사관 앞에 일본 카메라가 우리 시위 끝나면 딱 돌리고 시위 할 적엔 딱 이리 보고 있습니다” 수요시위가 열릴 때마다 일본 대사관 카메라가 할머니들을 감시한다면서 “저 노인 이제 힘도 없고 죽을 때가 다 됐다구” 할까봐 아픈 기색을 하지 않는다는 이용수 할머니. “내가 200살까지 살아야 일본하고 끝을 내지”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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