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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사특집 '다큐10' - 세계의 지도자들  
작성일 2007-06-15 조회수 16997
프로그램 정보 방송일자
자국민에 인기있는 해외 리더들, 비결은? EBS『다큐 10』창사 특집 ‘세계의 지도자들’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실험, 우고 차베스 변신의 귀재, 자크 시라크 이탈리아 중도좌파의 기수, 로마노 프로디 요르단의 젊은 지도자, 압둘라 2세 중동평화의 중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방송 : 6월 18일(월) ~ 22일(금) 밤 9시 50분 ~ 10시 40분
기획 : 이유자 PD(526-2568) 담당 PD: 최지현, 김래경, 정애진 (526 - 2573, 2580, 2585)
자의든 타의든, 올해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큰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한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와 발전의 내용이 온전히 최고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의 능력에 좌우되지는 않더라도, 당면한 핵심과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실현을 선도해 갈 리더십을 이끌어내는가 아닌가에 따라 향후 10년, 20년, 혹은 더 먼 미래의 모습까지도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 최고의 정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내용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고용 확대나 집값 안정 등 민생고를 적극 해결하는 한편 나라의 백년지대계가 될 만한 차세대 성장동력을 키우는 경제적 감각을 지녀야 하고,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며 올바른 정책 수립에 애쓰는 가운데서도, 엘리트 같은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거리감을 주는 대신 옆집사람처럼 친근해 보여야 한다. 여기에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계급적, 계층적 이해 조정은 물론, 국제 분쟁에도 적극 뛰어들어 평화를 이끌어내는 중재자의 능력까지 보여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우파정당 출신이라도 때로는 좌파적 정책을 과감히 도입하고, 과거의 정적과도 손을 잡는 ‘변신의 귀재’가 되어야 하기도 한다. EBS '다큐 10'은 세계 리더십의 생생한 실례를 보여주는 다큐 5편을 소개한다. 이번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직의 국가 최고 지도자로, 이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훗날로 미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지구의 다른 한 편에서 어떤 정치적 실험과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또 이를 견인하는 각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인지 비교 관찰해 볼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다큐10 - 세계의 지도자들 부제: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실험, 우고 차베스 원제: Chavez Revolution (일본 NHK) 방송일: 2007년 6월 18일 (월) 밤 9시 50분 담당: 최지현 PD 베네수엘라에는 지금 민영방송사의 방송허가 취소로 시끄럽다. 그 중심에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있는데, 그는 한 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암살 기도까지 불러일으키며 독재자로 여겨지고 있다. 원주민 혈통에 좌익 성향이 뚜렷한 그의 개혁 정책은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베네수엘라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베네수엘라 석유는 약 100년 전 미국의 석유회사에 의해 개발되었고, 그에 따라 석유로 발생하는 이윤도 모두 다국적 기업을 통해 국외로 흘러나갔다. 베네수엘라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베스는 이러한 석유 지배 구조에 반기를 들었다. 내 나라의 자원은 내 나라의 국민을 위해 써야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석유를 국유화하고 다국적 기업은 반드시 베네수엘라 공사와 합작을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이익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렸다. 오일머니를 따라 흘러들어온 시골 사람들이 도시 부근에 형성한 대규모 빈민가 역시도 수혜의 대상이었다. 차베스는 무료 급식소를 짓고, 문맹자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국에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가동하고 빈민가를 개발해 아파트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차베스의 석유정책과 쿠바를 가까이하는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미국이 반 차베스 파와 이웃 콜롬비아의 민병대를 이용, 호시탐탐 쿠데타 및 암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02년 4월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국민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차베스 혁명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미국이다. 현재 미국은 차베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응시하고 있다. 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차베스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열쇠가 될 것이다. '차베스는 합법적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당선된 것처럼 말이죠.' - 도널드 럼스펠드 前 미 국방장관 '히틀러는 미 부시 대통령과 비교하면 천진한 아이에 불과합니다.' -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다큐10 - 세계의 지도자들 부제: 변신의 귀재, 자크 시라크 원제: Chirac (프랑스, France Televisions Distribution) 방송일: 2007년 6월 19일 (화) 밤 9시 50분 담당: 김래경 PD 얼마 전 퇴임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단어가 ‘카멜레온’이다. 40여년의 정치 인생에서 늘 우파의 자리는 지키기는 했지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입장과 정책을 계속적으로 바꾸어왔기 때문이다. 95년에는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에서 핵 실험을 강행하도록 지시했지만, 임기 말년에 이르러 환경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것도 그런 변신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자크 시라크는 1932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해, 파리국립정치학교와 국립행정학교를 거쳐 1962년 퐁피두 총리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고, 그러한 성과에 힘입어 74년에는 프랑스 총리에 오른다. 이후 1977년부터 파리 시장을 지지내면서 국제적으로도 인지도를 높였다. 자신이 창설한 공화국연합당 대표로 1981년 5월 대통령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하지만, 1986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좌파인 미테랑 대통령 밑에서 총리에 취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좌-우파의 ‘동거’ 정부였다. 1988년 대선에도 나셨지만, 미테랑에게 또 다시 패배하고 총리직에서도 물러났다. 절치부심 끝에 1995년 조스팽과 발라뒤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2년 연임에 성공한다. 시라크는 임기 말년에 환경보호와 제 3세계의 빈곤 퇴치, 이라크 전에 대한 반대 등으로 독자적이고 미래를 생각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기도 했지만, 파리 시장 재임 시절의 불법 정치 자금 비리설과 관련해 정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난 5월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그의 파란만장했던 40년 정치 역정을 되돌아보자. ‘나는 정치인이 되기에 철저하지도 않고 속임수도 잘 모른다.’ -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 1988년 대선에서 미테랑에게 참패한 후 ‘시라크에게는 한 가지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노선과 정책을 아주 잘 바꾼다는 것입니다.’ - 레이몽 바르 전 프랑스 총리 다큐10 - 세계의 지도자들 부제: 이탈리아 중도좌파의 기수, 로마노 프로디 원제: Exposed (프랑스, France Televisions Distribution) 방송일: 2007년 6월 20일 (수) 밤 9시 50분 담당: 정애진 PD 유럽 각국에서 선거가 벌어질 때마다 전 세계는 과연 우파와 좌파의 대결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게 될 지를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본다. 그런데 유럽의 많은 지역 중에서도 좌파가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라가 이탈리아다. 현재 총리를 맡고 있는 ‘로마노 프로디’의 경우, 좌파와 중도파들을 규합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누가 보더라도 프로디 총리의 얼굴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옆집 아저씨에 더 가깝다. 볼로냐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그는 자신의 이론과 친근한 인상을 바탕으로 텔레비전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경제학 강의를 하면서 인지도를 높여갔다. 정계 진출을 결심한 프로디는 산업부 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탈리아 최대 국영기업 IRI의 사장으로 일하면서 만성 적자 상태의 회사를 7년 만에 흑자로 돌리면서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드디어 중도좌파 연합의 지도자가 된 프로디의 적수는 이탈리아의 언론재벌 베를루스코니였다. 전직 교수에 소탈한 인상 하나만으로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정치 거물 베를루스코니를 이길 수 있었던 무기는 바로 성실함과 평범함, 그리고 정책으로 승부를 건다는 뚝심이었다. 대선에서는 버스를 타고 전국 유세를 하고, 총리가 된 후에도 자전거를 타고, 일주일에 하루는 꼭 전철로 출근하는 지도자. 바로 그런 모습에서 이탈리아 국민들은 정말 옆집 아저씨와 같은 친근함과 동질감, 그리고 강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7남 2녀 중 여덟째로 태어난 ‘로마노 프로디’가 이탈리아의 지도자로 우뚝 서기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정치는 회사 경영과는 분명히 다른 일입니다. 국민들과의 관계와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죠' - 로마노 프로디 총리, 기업가 출신인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와 자신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민주주의를 억지로 이식할 수 있을까요? ... 민주주의는 강요해서 실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 로마노 프로디 총리, 이탈리아 군대의 이라크 철군을 발표하며 다큐10 - 세계의 지도자들 부제: 중동평화의 중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원제: Exposed (프랑스, France Televisions Distribution) 방송일: 2007년 6월 2일 (목) 밤 9시 50분 담당 PD: 정애진 1981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지금까지도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독재자가 아니라 ‘중동의 현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가 바로 이집트를 이끌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이다. 어떻게 25년 이상 장기집권을 하면서도 국민들의 신망과 국제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보통선거에서 88.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25년의 기나긴 장기집권 속에서 때로는 언론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대다수 이집트 국민들은 80살이 다 된 지도자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가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가 지금 이룬 업적들이 더욱 놀랍기만 하다. 장군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고, 엄청난 좌절과 아픔을 경험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 전부터 중동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앞장서서 주창해왔다. 이 때문에 이슬람 과격파들이 암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를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그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가장 많은 열정을 쏟았던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중동의 영구적인 평화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여파로 인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연 무바라크가 자신의 염원인 중동 지역의 눈부신 경제 성장과 영구적인 평화를 볼 수 있을까? 그는 오늘도 그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가장 후회되는 일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가장 먼저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죠' -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다큐10 - 세계의 지도자들 부제: 요르단의 젊은 지도자, 압둘라 2세 원제: Exposed (프랑스, France Televisions Distribution) 방송일: 2007년 6월 22일 (금) 밤 9시 50분 담당: 정애진 PD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메트의 43대 직계 후손. 중동 평화를 위해 힘을 쏟았던 후세인 1세의 아들. 현재 요르단을 이끌고 있던 국왕. 그를 설명하려면 끝이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압둘라 2세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주 특이하다는 것이다. 다른 아랍 왕가의 후계자들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많이 독특했다. 중등교육은 미국에서 받았는데, 보통 학생들처럼 공부를 싫어했고, 운동부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왕 자리보다는 자유를 누리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후계자의 길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국의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군인의 길을 걸어가던 압둘라는 다시 충격적인 결혼 소식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바로 팔레스타인계 여성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결혼으로 압둘라는 요르단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얻게 되는데, 요르단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바로 팔레스타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후세인 국왕의 후계자는 아들인 압둘라 2세가 아니라 그의 삼촌이 계승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세인 국왕은 건강이 악화되자, 팔레스타인 출신 국민과 서방 세계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현재까지 후세인 국왕의 그 선택을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압둘라 2세는 곧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외국 지도자들의 신임까지 얻게 된다. 그는 선왕의 정책을 계승해 나가며,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고, 특히 중동 지역의 평화 정착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던 경험은 그가 서양과 중동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압둘라 국왕은 경제와 더불어 교육 제도의 발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 중동 지역의 인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적인 학교를 건설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군대에서는 적이 분명하지만 정치는 더 복잡하더군요' - 압둘라 2세 국왕 '식탁에다 음식을 차리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4백만 명의 가족을 위해 상을 차리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 압둘라 2세 국왕 '모든 국민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힘 있는 중산층이 만들어져야 개혁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압둘라 2세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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